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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유럽, 백신 확보 ‘각자도생’의 길로… 이기주의도 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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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덴마크, 이스라엘과 ‘백신 동맹’
伊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호주 수출 제동
다급한 EU, 시큰둥했던 러시아 백신 검토
한국일보

지난달 11일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코로나19 백신접종 센터에서 의료진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병을 들고 있다. 코펜하겐=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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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공급 부족 현상이 유럽의 전통적인 외교 지형까지 바꾸고 있다.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던 유럽연합(EU)에선 ‘각자도생’ 움직임이 활발하다. 백신 수급 체계가 삐걱대자 회원국들이 비(非)회원국과 손을 잡고 제 살길 찾기에 나선 것이다. 전 세계가 백신 확보전에 열을 올리면서 자국에서 생산된 코로나19 백신을 다른 나라에 내주지 않겠다는 ‘이기주의’도 만연하다.

오스트리아ㆍ덴마크 총리는 4일(현지시간)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찾아 기자회견을 열고 코로나19 백신 연구개발을 위해 공동 기금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3국이 ‘백신 동맹’을 맺고 향후 2세대 코로나19 백신 연구에 의기투합할 계획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대유행) 사이클이 끝난다고 해서 다시 그런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백신 효능이 얼마나 오래갈지도 모른다”고 동맹 취지를 설명했다.

이번 협력은 두 유럽국가가 이스라엘에서 직접 코로나19 백신을 제공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공개 ‘외도’는 EU 당국이 제약사와 백신 공급 계약을 체결한 뒤 27개 회원국에 나눠주는 백신 정책에 균열이 생겼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벌써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52%)이 백신을 한 차례 이상 맞았지만, EU에 속한 오스트리아와 덴마크는 속도전에서 뒤처져 있다. 오스트리아의 백신 접종률은 5.5%에 그친다. 물량 부족과 계약 분쟁 등으로 접종에 차질이 빚어진 까닭이다.

아예 서구 선진국 밖에서 직접 물량 확보에 나선 EU 회원국들도 있다.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이달 초 러시아 스푸트니크V 백신의 긴급사용을 승인했다. 헝가리는 중국 시노팜 백신도 도입해 이미 접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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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슬로바키아 코시체국제공항에 러시아 스푸트니크 V백신이 도착하고 있다. 코시체=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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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백신을 둘러싼 유럽 내 이합집산이 가열되면서 이기주의도 꿈틀거리고 있다. 외신은 이날 아스트라제네카 측이 최근 이탈리아 소재 공장에서 최종 포장된 코로나19 백신 25만회분의 호주 수출을 허락해 달라고 현지 정부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전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백신 업체가 EU와 계약한 공급량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역외 수출을 불허한다는 규정을 근거로 제동을 걸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이탈리아의 규제 조치는 해당 규정을 활용한 첫 사례”라며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백신 확보 경쟁의 단면”이라고 평가했다. 백신 접종률이 목표치보다 계속 뒤처지자 유럽 전체가 ‘보호주의’ 색채를 선명히 드러낸 것이다.

EU 집행부는 다급해졌다. 한 때 경멸했던 러시아산 백신에까지 손을 뻗치며 불신을 극복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날 유럽의약품청(EMA)는 스푸트니크V 백신 동반심사에 착수했다. 통상 평가 절차에선 모든 근거 자료를 제출해야 하나, 동반심사는 개발 진행 상황에서 확보된 자료만 검토 대상이 된다. EU의 절박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러시아 정부가 지난해 8월 스푸트니크V를 세계 최초로 승인할 때만 해도 유럽은 “효능과 안전성을 신뢰할 수 없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최종 3상 임상시험에서 이 백신의 예방 효과가 91.7%로 나타나자 뒤늦게 태도를 바꿨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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