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들 지울수 없는 상처
“가해자는 기억조차 못할텐데…”
성인 된 후에도 트라우마 남아
신뢰 결핍… 사회생활 부적응도
“응당한 처벌·진정한 사과 필요”
두 아이의 엄마인 직장인 A(33)씨는 요즘 자주 악몽을 꾼다.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놀림거리가 되는 꿈이다. A씨를 괴롭히는 이들의 얼굴은 나오지 않지만, 잠에서 깨면 늘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16년 전, 고등학생인 A씨를 따돌리고 괴롭히던 같은 반 아이들이다.
잊고 살려 했던 기억이 불쑥 떠오른 건 최근 학교폭력 폭로가 잇따르면서다. A씨는 “평소 멀쩡하게 봤던 이들이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것을 보니 날 괴롭혔던 아이들도 지금 어딘가에서 멀쩡한 척 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동안 상처를 잊은 척 살았지만 사실은 하나도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너무 괴롭다”고 토로했다.
최근 배구선수 이재영·다영 자매 등 유명인의 학교폭력이 잇따라 폭로되면서 학교폭력의 심각성과 폐해가 재조명되고 있다. 많은 피해자들은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가 남았다고 말한다. 가해자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잇따른다.
16일 다수 논문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은 우울과 불안, 예민함 등의 피해를 공통적으로 호소했다. 특히 장기간 피해를 본 학생들은 자아 존중감이 낮아지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피해 경험은 타인에 대한 경계나 신뢰 결핍으로 이어져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방해하기도 했다.
지난해 발표된 논문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사회불안에 미치는 영향: 거부민감성의 매개효과’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타인에게 거부당하는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부민감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학창 시절 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는 B씨는 “원래 활발했는데 따돌림을 당한 후 성격이 많이 변했다”며 “사회생활을 할 때도 ‘저 사람들이 날 안 좋게 보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들 때가 있다.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C씨는 “나를 괴롭혔던 애들이 대기업에 다니거나 공무원이 됐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괴롭다”며 “정작 가해자들은 잘사는 것을 보면 억울하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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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유명인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폭력 폭로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남는 트라우마 때문”이라면서 “피해자들은 과거에 겪은 억울함과 상처 등을 지금이라도 치유하고 사과받고 싶어 폭로에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는 계속 나오고 있다.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응답은 2017년 0.9%(약 3만7000명)에서 2019년 1.6%(약 6만여명)까지 늘었다.
전문가들은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사회가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학교폭력은 지능화·조직화해 성인들의 폭력과 비교해도 죄질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이럴 때는 형사사건으로 취급해 공권력이 적극 개입해야 한다. 폭력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에 대한 조치가 제때 이뤄지는 것이 트라우마 등 2차 피해를 막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유지혜·이희경·이강진 기자 kee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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