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03 (월)

가습기살균제 연구자들 "법원, 문맥 자르고 반대로 인용"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가습기메이트' 무죄 판결에 항변

19일 기자회견 열고 공개비판 예정

중앙일보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CMIT/MIT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들이 피해 증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CMIT(메틸클로로이소티아졸리논)와 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 성분의 가습기 살균제(가습기메이트)를 제조·판매한 업체 대표와 임직원에게 무죄를 선고한 법원의 판결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있다. 피해자와 검찰에 이어 재판에 전문가 증인으로 참여했던 연구자들도 "재판부가 증언과 연구를 문맥과 달리 취사선택했다"고 공개 비판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19일 오전 기자회견에 참석해 이같은 의견을 발표할 예정이다.

앞서 12일 서울중앙지법은 ‘가습기메이트’를 제조ㆍ판매한 SKㆍ애경ㆍ이마트의 전직 대표와 임직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가습기살균제의 주요 성분(CMIT/MIT)이 폐 손상을 일으킨다는 과학적 입증이 부족하기 때문에 업무상 과실치사ㆍ상 혐의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1심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가습기메이트로 인한 각종 피해를 신고한 이들이 지난 10년간 1300여명에 이르고 이중 240여명이 숨졌지만, 재판부는 ‘형사상 책임을 질 가해자는 없다’고 판결한 셈이다. 앞서 2018년 PHMG가 포함된 가습기살균제를 제조 판매한 옥시·홈플러스·롯데마트의 전·현직 임직원에 대해 징역 4~6년형이 확정된 것과 대조적이다.



연구자들 "내 취지가 아니라 재판부 해석"



중앙일보

2019년 서울시청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어린이가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뉴스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려대 환경생태학부 권정환 교수는 1심 당시 법정에서 첫 번째 전문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권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재판부는 변호인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을 인용해 ‘CMIT/MIT로 인한 폐 섬유화가 발생하기 어렵다는 취지’라고 해석했는데, 그건 재판부의 해석이지 내 취지가 아니다”라며 “역으로 ‘물질이 폐로 들어갔을 때 폐 섬유화를 일으킨다는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면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권 교수는 재판부가 실험 결과를 취사선택했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가습기살균제 사용 환경에서 살균제 성분이 얼마나 폐에 도달하는지 분석하는 ‘노출재연실험’을 주도했다. 권 교수는 “2019년 연구에서 일반적인 가습기 사용환경에서 CMIT/MIT가 공기 중에 떠다닌다는 걸 입증했는데도, 재판부는 다른 이유를 들어 ‘위해성을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판결문의 결론과 달리 재판부는 ‘폐 섬유화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실험 결과는 인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판결과 반대되는 근거는 인용하지 않았다"



중앙일보

2019년 열린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CMIT/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한 피해자와 가족이 나와 피해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노출재현실험과 세포독성 실험을 수행했던 이종현 박사(EH R&C 환경보건안전연구소장)도 재판부를 비판했다. 이 박사는 “법정에서 현재의 위해도 평가 방법으로는 실제 독성이 과소평가된다는 지적을 했고 CMIT/MIT의 독성에 대해 '앞으로 더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며 “그런데 재판부는 앞부분은 빼고 더 조사가 필요하다는 내용만 인용해 '아직 독성에 대해 밝혀진 연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식이었다"고 했다.

그는 "전문가의 말을 잘라 인용하면서, 정작 전문가의 종합적 판단은 배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해당 연구에 참여한 다른 연구자 A씨도 “결과적으로 이번 판결문만 읽어보면 ‘아, 폐 손상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가 없구나’라고 생각하게끔 쓰였다. 그건 내 판단과 다르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2017년 발간된 '마우스의 기도 내 점적을 통한 가습기살균제 CMIT/MIT와 사망 간의 원인적 연관성에 관한 연구' 일부와 발췌. 논문에서는 'CMIT/MIT는 폐섬유화 이전에 이미 사망을 초래할 수 있고 사람에게서도 발생이 가능한 독성물질로 추정된다'에 방점을 찍었지만, 재판부는 '이 논문 결과는 CMIT/MIT는 폐섬유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반증으로 볼 수도 있다'고 봤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실험 공정성 의심한 듯, 변호사 논리 받아들여"



중앙일보

3주간 고농도로 흡입독성실험을 진행했을 때 폐 세척액(폐 조직 일부와 분비물 포함)에서 단백질 수준 변화가 관찰되었다. 재판부는 '실제 환경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높은 농도에서도 CMIT/MIT로 인한 장기의 독성학적 영향은 전혀 관찰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재판부는 정부의 의뢰로 진행된 실험의 신빙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나타냈다. 특히 판결문에서 일부 실험에 대해 "가정에 부합하는 결과가 나와야 실험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연구자의 편향이 개입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사실상 조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에 대해 권 교수는 “과학에서 실험은 ‘가설’을 설정한 뒤, 그 가설에 도달하기 위해 여러 조건을 설정해 시도해보는 과정인데 이를 연구진이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실험한 것처럼 해석했다”고 비판했다. 이 박사도 “이번 사건의 결과물인 ‘폐 섬유화’가 발생하려면 어떤 조건에서 발생하는지 찾아나가는 게 애초 실험의 요지”라며 “실험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변호인의 시각이 판결문에 그대로 담겼다”고 지적했다.

‘100%’ 장담 못 하는 과학, ‘100%’ 장담하라는 법원

연구자들은 과학적 사고와 법률적 사고의 괴리가 컸다고 했다. 이 박사는 “재판부는 ‘100% 확실한 것’을 원하지만, 과학자에게 ‘폐 섬유화를 일으킨다’를 완벽하게 입증해내라고 요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환경부 피해판정도 '믿을 수 없다'



중앙일보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인체에 유독한 원료 물질로 만들어진 가습기 살균제를 유통·판매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현직 임직원에 대한 1심 선고공판 결과가 나온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판정 기준과 절차는 최대한 많은 신청인을 구제하려는 목적으로 보다 폭넓게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환경부가 진행한 가습기살균제 피해판정 등급의 신빙성에 의문을 나타낸 것이다.

이에 대해 2011년 1차 피해판정부터 참여했던 홍수종 교수(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는 “1, 2차 피해판정은 무척 엄격하게 진행했다"며 "기소된 혐의에 포함된 피해자들은 자신과 가족이 직접 CMIT/MIT로 인한 폐 손상 을 겪었기 때문에 느슨한 기준이 적용됐다는 법원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관련 연구를 총괄한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병이 이미 발생한 상황에서 원인을 찾기 위해 진행한 연구들을 ‘결론을 정해놓고 몰아가는 실험’으로 치부했다”고 지적했다.

연구자들은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의견을 밝히기로 했다. 의료소송 전문인 박성민 변호사(법무법인 LF)는 "전문가들이 재판에 출석해 증언하는 경우는 자주 있지만 판결에 대해 '재판부의 해석이 잘못됐다'고 공개적으로 입장을 내는 건 보기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검찰도 판결에 반발해 18일 항소했다. 검찰 관계자는 “재판부가 CMIT 성분 살균제와 폐 질환의 인과관계를 부인하려다 보니 앞서 옥시 가습기살균제 재판에서 받아들인 환경부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판단 과정까지 부인하는 판결이 나왔다”며 "대부분 변호인 측 주장과 논리가 그대로 수용된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