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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40여년 단절 ‘폐허생활’ 경주 한센인 마을 정비 더 못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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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생긴 경주시 희망농원

석면 지붕, 폐축사 위험 무방비

경주시, 희망농원 시설 개선 협약

권익위, 국무회의 안건으로 올려

중앙일보

11일 경주시 희망농원 건물. 크게 노후됐지만 무허가라서 수리가 어렵다. 김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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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천북면 희망농원. 경부고속도로 경주나들목으로 진입한 뒤, 차로 20여 분을 가면 나타나는 마을이다. ‘희망농원’이라는 이름 탓에 농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엄연히 주민 160여 명이 사는 집단 거주지다. 주민 대부분이 닭을 키우며 살고 있다.

지난 11일 오후 희망농원을 향해 농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조류 인플루엔자(AI) 확산을 막기 위해 설치해 둔 방역시설이 나타났다. 차량이 방역시설을 통과한 직후 마주한 것은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이 생긴 건물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이었다.

건물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낡아 보였다. 슬레이트 지붕과 콘크리트 벽은 곳곳이 깨져 있었다. 구멍 난 곳은 대충 합판이나 방수포로 가렸다. 건물 안을 들여다보니 닭을 키울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희망농원 일대에 이런 계사 425개 동이 있다.

여름이면 이곳은 더욱 살기 어려워진다. 가축 배설물 악취가 진동한다. 해충도 들끓는다. 장마철엔 분뇨와 생활하수가 형산강으로 흘러 들어가 민원이 속출한다.

작업복을 입은 한 주민이 마을 어귀 축사 안에서 소를 돌보고 있었다. 희망농원에서 35년을 살았다는 윤모(60)씨는 “건물 대부분이 무허가인 데다 주민 지갑 사정이 좋지 않아 고치고 싶어도 못 고친다”며 “그래서 이곳이 판자촌처럼 보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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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 인플루엔자 가 발생해 계사 내부가 텅 비어있다. 김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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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을 방불케 하는 이 마을은 6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59년 정부는 경주시 성건동 성락원에 있던 한센인 60여 명을 자활사업 명목으로 현재의 보문관광단지 위치로 옮겼다. 이어 61년에는 칠곡군에 있던 애생원 소속 한센인 200여 명도 함께 이동시키고 마을 이름도 ‘희망촌’으로 바꿨다. 당시 정부는 한센인들의 자활을 위해 이들을 이주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기 위한 강제이주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망촌 한센인들은 다시 79년 보문단지가 개발되면서 지금 마을로 이전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닭을 키우고 달걀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외부와는 40여 년간 단절돼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희망농원 환경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락우 경주시의원은 지난해 6월 열린 시의회 본회의에서 “희망농원 주민들은 발암물질인 석면 지붕과 폐축사 등 각종 위험에 무방비 노출돼 있을 뿐만 아니라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이중삼중 고통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주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28일 포항시·경북도·국민권익위원회·대구지방환경청과 협약을 맺고 희망농원 시설을 개선하기로 했다. 노후 계사와 폐슬레이트 철거, 노후 침전조·하수관거 정비, 노후 주택정비, 요양원 설립 등 계획이 세워졌다. 이날 전현희 권익위원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 주낙영 경주시장 등이 현장 점검을 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권익위는 오는 19일 열리는 대통령 주재 국무조정회의에서 희망농원 환경개선사업과 관련한 전반적 사항을 공식 안건으로 보고한다. 권익위는 과거 희망농원 강제 이주로 고통받은 한센인과 이주민의 정주 여건 개선을 위해 범정부 차원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설명할 예정이다.

주 시장은 “희망농원 환경개선에 많은 예산이 소요되는 만큼 범정부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유관기관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환경개선이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행정력을 총동원하겠다”고 말했다.

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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