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숙 작가 『아르미안의 네 딸들』
복간판 선판매 목표액 41배 돌파
여성만 왕위 잇는 가상왕국에 매료
40·50대 독자들 “딸과 함께 또 볼 것”
지난 4일 출간된 『아르미안의 네 딸들』 레트로판. 고대 중동 지역의 가상 왕국 아르미안 마지막 네 왕녀들의 모험을 그린 신일숙 작가의 대표작이다. 35년 전 도서출판 프린스에서 출시 한 옛 표지를 되살려 팬들의 추억을 자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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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판이 있는데 또 샀다는 ‘찐팬’도 있더군요. 진짜 고마웠어요. 그 당시 석 달에 한 권씩 내면서 만화가 질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알아주는 팬들이 있구나, 싶어 기분이 좋았죠.”
1986년 발표한 순정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35년 만에 옛 표지로 다시 펴낸 신일숙(59) 작가의 말이다. 복간판 사전 독자 펀딩에서 1억원 선판매를 기록했다. 지난 6일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만화 그리기 잘했다”며 즐거워했다.
지난 4일 출간된 『아르미안의 네 딸들』 레트로판. 고대 중동 지역의 가상 왕국 아르미안 마지막 네 왕녀들의 모험을 그린 신일숙 작가의 대표작이다. 35년 전 도서출판 프린스에서 출시한 옛 표지를 되살려 팬들의 추억을 자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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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RPG 게임의 전설 ‘리니지’의 원작 만화로 이름난 그가 데뷔 2년째 선보인 초기 대표작이자, 한국순정만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고대 그리스·페르시아의 실제 역사에 여성만이 왕위를 잇는 가상 왕국 아르미안의 마지막 네 왕녀의 모험을 접목했다. 신과 인간을 넘나든 대범한 상상과 화려한 그림체로 큰 인기를 누렸다.
지난 4일 출간된 이번 레트로판은 도서출판 프린스에서 86년부터 나온 추억의 전집(전 20권)을 출판사 거북이북스가 복간한 것. 원본 표지를 스캔해 신 작가가 직접 포토샵으로 수정해 마무리했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지난달 1일 독자 펀딩을 시작해 3주만에 목표금액 300만원의 41배가 넘는 1억2467만원(854명 참여)으로 마감했다. 알라딘 북펀드 사상 최고금액이다. 철학자 고병권의 에세이집 『다시 자본을 읽자』의 3354만원 기록을 2년 만에 제쳤다.
펀딩 응원란에는 “고등학교 때 보았던 작품인데 이제는 중학생 아이와 함께 볼 수 있겠다” “엄마가 좋아하시던 책을 구입하게 됐다”같은 댓글이 달렸다. 순정만화를 보고 자란 30~50대 여성팬에 더해 뉴트로 열풍에 힘입은 10~20대 독자층이 가세했다.
지난 4일 출간된 『아르미안의 네 딸들』 레트로판. 고대 중동 지역의 가상 왕국 아르미안 마 막 네 왕녀들의 모험을 그린 신일숙 작가의 대표작이다. 35년 전 도서출판 프린스에서 출시한 옛 표지를 되살려 팬들의 추억을 자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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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데뷔작 『라이언의 왕녀』부터 바이킹족의 침략에 맞선 왕녀의 사랑과 운명을 그렸던 신 작가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고대 중동에서 신비한 능력을 가진 네 왕녀로 스케일을 더 키웠다. 80년대 순정만화계에서 “행복한 약자보다 영원히 고독한 강자의 길”을 택하는 아르미안의 왕녀는 앞서나간 캐릭터였다.
나란히 왕의 운명을 타고난 맏딸 마누아와 막내 샤르휘나의 대결이 주축을 이루지만, 여성 대 여성 구도에서 흔히 보이는 연적으로 엮지 않은 점도 눈에 띈다. 신 작가는 “끈적끈적한 걸 못 참는 성격이라 치정이 얽힌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또 “네 자매 삶의 테두리는 정해져 있었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내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인물들이 스스로 살아가더라”고 했다.
신일숙 작가가 일산 화실에서 자신의 반려묘들과 함께한 모습이다. [사진 거북이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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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결정적 순간마다 반복·변주된 ‘운명이란 예측 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란 대사는 독자들의 유행어가 됐다.
극중 여성이 왕권을 잇기에 왕가의 남자아기는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는 아르미안의 세계관은 가부장제·남아선호가 강했던 80년대 한국사회를 정반대로 비춘 거울 같기도 하다. 언니와 남동생을 둔 신 작가의 성장기 느낌도 녹여냈다. “그 시대엔 우리 집보다 더 심한 집이 많았어요. 누나들이 남동생한테 두들겨 맞는 집도 있었죠. 남동생 하나 낳으려고 위에 딸을 줄줄이 낳는데 딸들은 전부 남동생과 집을 위해 희생하고 시집가서도 천대받는 걸 너무 많이 봤죠.”
“특별히 페미니즘이라기보다 생각이 깨이길 바랐다”는 그는 세상이 정한 틀에 갇히지 말라는 당부를 만화 곳곳에 담았다. 또 “인간을 인간으로 평가하고, 여자도 인간이란 걸 인정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내 작품을 읽고 여자들도 용기 냈으면 하는 마음이 작품에 묻어난 것 같다”고 했다.
상상 속 허구에 실존 역사·인물도 접목했다. 아르미안의 네 왕녀 중 둘째 스와르다는 성서 ‘에스더서’에서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가 유대인 왕비 에스더를 맞기 전 폐위했다고 짧게 전하는 왕비를 모델로 빚어낸 캐릭터다. 셋째 아스파샤는 고대 아테네 정치가이자 군인 페리클레스의 실존 연인 아스파시아를 토대로 만들었다. 여기에 전쟁과 파멸의 신 에일레스, 황금빛 신마(神馬)의 정령 미카엘, 반인반수 불의 고양이 등이 가세했다.
국내에서 영상화 제안도 받았지만, 한국 배우로 하자는 얘기에 거절했단다. 고대 중동 무대의 세계관을 지켜내기 위해서다. 신 작가는 어릴 적부터 책 읽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인생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 오랫동안 한국은 불모지라 여겨졌던 SF·판타지 장르를 “그저 재밌고 좋아서” 꾸준히 지켜왔다. 88년 연재를 시작한 『1999년생』은 밀레니엄을 한해 앞두고 폭발적으로 출생한 초능력 아이들을 외계에 맞선 공격대로 훈련시키는 우주 SF다. 98년작 『파라오의 연인』은 파라오의 저주를 다룬 타임슬립물이다.
“지금 시작하는 작가들한테 좋아하는 걸 하라고 해요. 언젠가 네가 좋아하는 분야가 그 시대에 어울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요.”
올해로 만화가 데뷔 37년째. 어시스턴트 한 명과 함께 여전히 왕성한 현역으로 활동 중인 그의 자기 관리 비결은 뭘까. “무조건 하는 거예요. 거의 일주일 내내 일하죠. 힘들어도 퀄리티를 낮추고 싶지 않아요. 작가란 몸을 갈아 넣는 직업입니다.”
이번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복간판 펀딩 성공이 순정만화 소장판에 새 물꼬를 틀 것으로 보인다. 거북이북스는 ‘레트로판(RETRO PAN)’ 레이블을 계속 이어나갈 예정. 알라딘 만화 MD 도란 과장에 따르면 알라딘도 몇몇 만화 출판사에서 제안을 받아 절판 도서 복간판뿐 아니라 다양한 만화를 북펀드로 선보일 계획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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