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고발한 '청와대·검찰·경찰'은 무혐의
여성단체와 여당 의원, 서울시 젠더특보에 유출
"여성계가 피해자 인권 되레 침해" 비판 목소리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사망 당일인 지난 7월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가회동 공관을 나서 인근 길을 지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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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소 관련 내용이 여성단체에서 유출돼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보를 통해 박 전 시장에게 전달된 것으로 확인됐다. 권력형 성범죄 의혹과 관련한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서야 할 여성단체 인사들이 여권 유력 정치인의 피소사실 유출 과정에 관여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서울북부지검 형사2부(부장 임종필)는 30일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박 전 시장 피소 사실 유출 의혹 관련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 수사는 피해자 측이 지난 7월 '경찰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 박 전 시장에게 피소사실이 전달됐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당초엔 청와대가 경찰로부터 박 전 시장의 피소 사실을 보고 받은 사실이 드러난데다, 피해자 측이 경찰 고소 전에 검찰에 면담을 요청한 일까지 밝혀지며, 검·경과 청와대를 향한 시민단체의 고발이 잇따랐다.
하지만 검찰 수사결과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피소 관련 내용은 청와대와 검·경이 아닌, 여성단체→여당 국회의원→임 특보를 통해 유출된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 측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여성단체 대표에게 전화했고, 그 내용이 다른 여성단체 쪽으로 흘러들어간 뒤 남 의원과 임 특보를 통해 박 전 시장에게 전달된 것이다. 남 의원과 임 특보는 모두 여성계 출신으로, 임 특보는 남 의원실에서 보좌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남 의원은 박 전 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한 뒤 "박 전 시장에 대한 피소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고, 민주당이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규정하도록 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김재련 변호사→여성단체 2곳→남 의원→임 특보→박 전 시장
검찰 수사와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피해자를 대리하는 김재련 변호사는 경찰에 고소장을 접수하기 전날인 지난 7월 7일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에게 전화해 대략적인 피해 상황을 전달하며 지원을 요청했다. 김 변호사는 고소 예정 사실만 알렸을 뿐, 구체적 사건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피소 사실 관련 7월 7일 전달 경위. 김대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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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소장이 이후 여성단체 대표 A씨(7일 오후)에게, A씨는 같은 단체 공동대표인 B씨(8일 오전)에게, B씨는 친분이 있던 남인순 의원(8일 오전)에게 차례로 관련 내용을 전달했다. 남 의원은 B씨와의 통화 직후인 8일 오전 10시 33분 박 전 시장 측근이자 남 의원 보좌관 출신인 임순영 특보에게 전화해 '박 시장 관련 불미스러운 얘기가 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임 특보는 이후 여성계 쪽에 박 전 시장 피소 관련 내용을 확인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임 특보는 8일 오전 10시 39분에 이미경 소장에게 전화해 내용을 확인했고, 이 소장는 '어떻게 알았느냐'는 취지로만 답했다고 한다. 남 의원에게 박 전 시장 관련 내용을 전달했던 B씨는 이날 임 특보에게도 '전화를 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남겼고, B씨는 임 특보와의 통화에서 '여성단체가 김 변호사와 접촉한다'는 취지로 상황을 설명해줬다.
박 전 시장 피소 사실 관련 7월 8일 유출 경위.김대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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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특보는 당일 오후 3시쯤 박 전 시장과 독대해 피해자 측 움직임을 직접 전달했다. 임 특보가 '불미스러운 일이 있는 것 같다, 아는 것이 있냐'고 물었고, 박 전 시장은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박 전 시장은 8일 밤 임 특보와 기획비서관을 공관으로 불렀고, 이 자리에서 '피해자와 문자를 주고 받았는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털어놨다.
박 전 시장은 공관 회의 다음날인 7월 9일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공관에 남긴 메모), '아무래도 이 파고는 내가 넘기 힘들 것 같다'(임 특보에게 보낸 텔레그램 메시지), '이 모든 걸 혼자 감당하기 버겁다'(고한석 전 서울시 비서실장과의 통화)는 메시지를 남긴 채 세상을 등졌다.
박 전 시장 피소 사실 관련 7월 9일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보의 대응 경위. 김대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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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계, 피해자 인권 되레 침해
검찰 수사결과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 피소 사실은 피해자 측의 공식 입장을 통해서 알려진 게 아니라, 여성계 인맥을 통한 사적 채널로 유출된 것이라 논란이 커지고 있다. 여성단체가 성폭력 사안에 대해 여당 의원과 서울시 특보에게 '내용을 알고 있었느냐'고 물으며 상황을 전달한 것은, 피해자 인권보호와는 거리가 먼 일이다.
서울시의 성폭력 이슈를 책임지는 임 특보가 피해자보다는 박 전 시장 입장에서 움직인 사실을 두고는 특히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임 특보는 응당 취해야 할 피해자 보호 조치 대신에 여러 차례에 걸쳐 여성단체 쪽에 연락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물었다. 8일 공관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는 여성단체 측에 연락해 '무슨일이냐, 좀 알려달라'고 이야기했고, 9일 오전에는 '내가 구체적인 것을 묻는 게 아니라, (준비하는 게) 기자회견인지 고소인지 등 알려주면 안 되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검찰은 그러나 여성단체와 남 의원, 임 특보 등에 대해서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다. 검찰 관계자는 "시민단체는 공무원이 아니고 특보와 국회의원도 자신이 업무를 집행하면서 알게 된 비밀을 알린 게 아니기 때문에 업무상 비밀누설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시민단체가 고발한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과 김욱준 4차장 검사, 유현정 여성아동범죄조사부장 등에 대해서도 불기소 처분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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