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 빈스의 저서 '초월', 불·언어·미·시간으로 인류사 통찰
이후 지구에서 수많은 지질학·물리학·화학적 변화가 일어났지만, 6천600만 년 전의 사건이야말로 인류 탄생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거대 운석이 지금의 멕시코 남동부에 있는 유카탄반도에 떨어지면서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을 멸절시켰다. 그 생태학적 공백을 채운 건 다름 아닌 인간의 포유류 선조들이었다.
급격히 변화한 환경에 적응한 인간은 지구상에 현존하는 대형 생명체 중 개체 수가 가장 많은 존재로 부상했다. 그 비결은 인간만이 지닌 사회화 과정이었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 관계이면서도 멸종 위기에 몰린 침팬지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수수께끼 같은 우리 인간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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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과학 저술가인 가이아 빈스(영국왕립학회 과학도서상 최초의 여성 단독 수상자)는 저서 '초월'을 통해 인간이 우주의 객체가 아니라 변화의 주체가 될 역량을 지닌 생명체라고 찬탄한다. 그녀에 따르면,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주어진 환경에 따라 적응의 형태를 진화시켜왔다. 그 중심에는 바로 '문화'가 있었다.
인간 진화의 3요소로 '유전자', '환경', '문화'가 꼽힌다. 이 가운데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인간을 '호모 옴니스(Homo omnis·'초월종 인간', 또는 '전능한 인간')'로 진화시킨 결정적 요소는 '문화'였다. 인간의 진화가 각 개체 수준에서 영향을 받는 생물학적 변화뿐 아니라 집단 선택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문화적 변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십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은 이 문화를 이용해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모든 생명체의 종을 가두고 있던 물리적·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였다. 이 놀라운 진화 과정의 핵심에는 바로 '불'과 '언어'와 '미(美)'와 '시간'이 있었다. 언제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만큼 아슬아슬했던 생존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이 4가지의 위대한 문화적 환경 덕분이었다. 이를 하나씩 간략히 알아보자.
여타 동물은 내재된 본능이 알려주는 기술에 의존해 생존하지만, 인간은 생존과 관련한 기술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익히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학습을 통해 생존해왔다. 그 대표적 도구 중 하나가 바로 '불'이었다. 문화적 진화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불은 식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그 결과로 두뇌의 급격한 발달을 가져왔다. 본래 가지고 있는 능력 외에 불이라는 또 다른 힘을 빌려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신체적·사회적 역량을 크게 확장시킨 것이다.
진화는 각 개체 사이의 정보 전달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의 문화적 진화에서 핵심적인 정보는 '언어' 속에 숨어 있었다. 언어를 통해 성공 비결을 공유하고, 복잡한 문화적 지식도 전달·저장할 수 있었다. 일종의 사회적 접착제인 언어는 공통된 이야기로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줬다. 인간의 활동 무대를 지구 전체로 확장하며 권력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 또한 이 언어였다.
생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인간은 '미', 즉 아름다움을 통해 공통의 신념과 정체성을 중심으로 하나가 돼 융합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은 아름다움이라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처럼 인간이 이뤄낸 위대한 협력의 근간에 아름다움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강력한 사회적 도구인 아름다움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낳았을 뿐 아니라 생각과 개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면서 사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국가는 이렇게 만들어진 가장 큰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충동을 넘어 아름다움으로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게 된 인간은 '과연 나는 누구이며, 시공간의 어디쯤 위치하는가'와 같은 '시간' 속의 존재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과거를 기억하고 그 가르침을 얻고자 기록을 남기면서 현재에 발을 딛고 살아온 것. 나아가 미래를 알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관찰하고 예측하며 측정하고 추론한 결과로 시간을 발명해 자연의 고유한 흐름에서 벗어나 하루를 재정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유전자', '환경', '문화'라는 인간 진화의 3요소를 통해 '불', '언어', '미', '시간'이라는 4가지 위대한 문화적 발견을 이뤄낸 인간은 이제 전능한 초유기체, 즉 '호모 옴니스'로 진화하고 있다고 저자는 설파한다. 전 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상호 소통하는 지금, 집단이 가진 지성과 창의성, 사회성은 단순한 물리적 합 이상의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한편으로 부작용 또한 적잖게 나타난다. 예컨대, 생물학적 시간에서 문화적 시간을 분리하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이제 인간과 상관없는 일이 되다시피 했다. 가정과 도시는 인공의 불빛으로 가득해졌고, 세포가 알려주는 시간과 스마트폰이 알려주는 시간 사이에 불일치가 일어나면서 자연과 인간의 균열은 커져만 간다. 자연을 거침없이 파고드는 인간의 탐욕이 심각한 환경 파괴와 질병, 급기야 코로나19 같은 신종 전염병에 이르기까지 부메랑이 돼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학문적 깊이와 사색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번 신간은 인류가 맞게 될 미래가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한 것처럼 또 다른 초월의 과정을 거쳐 신세계가 될 것인지, 아니면 생의 터전인 지구와 함께 자멸하게 될 건지 숙고케 한다. 다음은 책을 마무리하며 저자가 들려주는 메시지로, 현생 인류의 책임이 뭔지 진지하게 일깨운다.
"지난 수만 년 동안 인간은 서로 힘을 합쳐 믿을 수 없는 마법 같은 일을 해냈다. 모든 인간은 특별한 존재의 일부분이며 집단 문화의 주요 내용을 반복함으로써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해결책도 함께 나타나리라 기대한다.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인간 자신이니까."
우진하 옮김. 쌤앤파커스. 536쪽. 2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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