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의 본질로 돌아가자. 어떤 접근이 위안부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위안부 문제’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외교’는 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나. 답은 지난 30년간 발전한 위안부 담론을 추적하면 찾을 수 있다.
본 기자는 그 답을 함께 찾기 위해 이번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운동·외교현안·연구분야·국제 여성 인권문제로서 위안부 담론이 발전한 과정을 파헤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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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강제성을 인정했던 일본 정부는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과거 식민지배 시절 자행한 각종 강압정책을 노골적으로 부인하기 시작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이끈 일본 정부의 과거사 접근은 과거 ‘극우’ 정권으로 평가됐던 고이즈미 정권보다도 퇴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 수정주의를 지향하는 일본 정부의 출범은 보수주의 이단아 혹은 방계 취급받았던 ‘세이와정책연구회’(세이와·호소다 파벌)가 자민당의 최대 파벌로 자리잡으면서 이뤄졌다. 일본군 위안소제도의 강제성을 부인하기 위한 세이와 파벌의 작업은 세이와파를 부흥시킨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정권이 출범하기 이뤄지기 훨씬 이전부터 이뤄졌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일역모)이다. 자민당 내 5선 이하 의원을 중심으로 중참 87명의 의원이 활동을 했다. 자의적인 참여도 있었지만,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장하기 위해 참여한 의원들도 있었다.
일역모, 시민단체 ‘새역모’와 황국사관 담론 확장고노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에 반발해 탄생한 이 모임은 일본 초·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위안소 제도에 대한 기술 자체가 ‘자학적 사관’이라고 주장했다. 일역모의 초대 회장은 나카가와 쇼이치 전 재무상. 아베 전 총리는 당시 모임의 사무국장 대리를 맡았고, 현 총리인 스가 요시히데도 일원으로 참가했다. 모임을 주도한 건 세이와파였지만, 자민당의 다양한 파벌 소속 의원들이 참가를 했다. 고베 대지진과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으로 자민당 내 보수 온건파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는 약해진 상태였다.
여기에 극우 시민단체가 세이와파의 지지기반을 확장해나가기 시작한다. 바로 ‘일본회의’의 전신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1997년 설립)이다. 해당 모임은 일본 제국주의와 황국 사관을 미화하는 데에 앞장 서 왔다. 일본군 위안부가 물리적인 ‘강제연행’을 당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논리를 구축한 것도 일역모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일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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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는 1981년 당시에는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역사교과서 진출사업을 꾀했다. 하지만 좌절되자 모임을 새로 구성해 대중에게 일본 제국주의를 ‘전통주의’라 인식시키는 활동을 추진했다. 일역모 의원들은 단체 일원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세력기반을 키워나갔다. 당시 단체를 만든 니시오 간지, 후지오카 노부카쓰, 다카하시 시로 모두 아베 정권에 역사교육정책의 방향을 자문했던 인물들이다. 특히 다카하시 시로 메이세이대학교 교수는 아베 전 총리의 이른바 ‘정책 브레인’이라 불리며 일본의 교육헌법인 교육기본법 개정에 일조했다. 오늘날 일본의 교육기본법은 맹목적인 애국심을 강요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행정부 요직 차지한 일역모 의원들…정책에 황국사관 반영하지만 단순 여론몰이를 하고, 정책자문을 한다고 해서 왜곡된 ‘역사교육’이 성사되는 건 아니다. 일역모의 무서움은 바로 해당 단체의 소속 의원들이 모두 행정부 요직에 진출했다는 데에 있다. 고노담화 재검토 작업을 개시한 아베 2차 내각의 장관 47%는 일역모 출신 관료들이다. 19명의 대신 중 9명이 일역모 출신이었다. 3차 내각때는 스가 현 총리, 야마구치 순이치 전 오키나와북방담당상, 시오자키 야스히사 전 후생노동상, 시모무라 하쿠분 전 문부과학상, 기시다 후미오 전 외무상,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상, 나카타니 겐 전 방위상, 그리고 아베 전 총리 본인까지 총 8명이 일역모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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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시모무라 현 자민당 정조회장은 일역모에서 사무국차장을 맡았고, 아베 1기 내각 당시 관방부장관을 지내면서 고노담화의 재검토 필요성을 제기했다. 문부과학상으로서는 교육기본법 개정 업무를 주도했다. 기시다 전 외무상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과정에서 소녀상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아베 내각부의 노력을 몸소 실천했다. 이외에도 스가 현 총리뿐만 아니라 현 부흥상을 맡고 있는 히라사와 가쓰에이도 아베 정권시절 관방부장관을 지내면서 아베 전 총리를 보좌했다. 와타나베 히로미치 전 부흥상도 일역모 출신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구상한 ‘역사교육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공교롭게도 일역모 소속 의원들은 새역모가 분화해 구축한 극우 시민단체 ‘일본회의’의 국회의원 간담회에도 가입했다.
역사왜곡에 협조해버린 ‘손탁쿠’ 관료들8년 가까이 이어진 아베 정권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관료들의 정권 눈치보기였다. 정권 입맛에 따라 정책실무를 보는 관료들을 일본 언론은 ‘손타쿠(忖度) 관료’라고 불렀다. 이 표현도 아베 정권 들어 생긴 것이다. 손타쿠 관료의 조짐은 ‘고노담화 재검토’ 과정에서도 눈에 띄었다. 일역모는 고노담화의 타당성을 따진다며 외무성 출신 관료들을 불러냈다. 하지만 공부회에 진술하러 나온 관료들은 보수적 역사관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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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역모에 일본군 위안부들이 강제연행됐다는 “명확한 근거는 없었다”는 증언을 한 히가시 요시노부 당시 내각외정심의실 심의관과 히라바야시 히로시 내각외정심의실 실장은 이후 대기업 사외이사를 지냈고, 아베 1기 내각의 북방대책본부 북방대책본부장에 역임했다. 특명 전권대사에도 임명됐다. 일본인 납북피해자 진상규명을 맡았던 나카야마 쿄코 전 내각 관방참여도 아베 전 총리가 고이즈미 내각에서 힘을 키우던 당시 편에 섰던 인물이다. 쿄코 전 관방참여는 2016년에는 중의원으로서 아베 전 총리로부터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는 위안소 설치 및 운영과정에서 일본군이 관여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물리적 강제연행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답변을 참의원예산위원회에서 이끌어냈다. 일본군 위안소제도의 강제성을 2015년 위안부 합의 틀 안에서 부인해버린 것이다.
일본의 오늘날 왜곡된 역사인식은 극우사상을 기반으로 한 학계와 시민사회, 정계, 그리고 관료조직 등의 긴밀한 상호작용의 결과물이었다. 아베 전 총리에 앞서 자민당 세이와 혹은 호소다 파벌을 득세시킨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역시 매파였지만, 당시 세이와파의 지배력이 약해 다소 유화적인 외교정책을 펼쳤다. 아베 전 총리도 1기 집권 당시에만 해도 극우적인 역사인식을 뒤로하고 지배력 강화를 위해 주변국과의 협력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깨트리고 진정한 사과를 받는 작업은 자민당 내 세이와 파벌, 그중에서도 일역모에 기반을 둔 정치인들의 세력이 약해져야 이뤄질 수 있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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