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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의 오마이갓] 120년 전 ‘명동성당 스타일’ 교회를 휩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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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초기 교회는 도심, 성당은 언덕 위로

천주교와 개신교는 조직이나 교리가 확연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뜻밖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빨간 벽돌 건물에 뾰족한 첨탑입니다. 최근엔 개신교 교회와 천주교 성당도 다양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지고 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빨간 벽돌+뾰족탑’은 성당과 교회를 가리지 않고 거의 공통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상가 건물 옥상에도 첨탑을 세운 교회도 많지요. 이런 교회 건축의 모델이 된 건물은 1898년 건축된 서울 명동대성당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명동성당보다 1년 앞서 1897년 건축된 정동제일교회의 일명 ‘문화재 예배당’이 있음에도 개신교 교회들도 명동성당 디자인을 더 모델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명동성당의 고딕 양식이 더 강렬한 인상을 줬기 때문이겠지요.

선교 자유가 허용된 후 개신교와 천주교의 건축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개신교 교회들은 도심, 즉 낮은 지역에서 한옥을 개조해 예배를 시작했지요. 장로교의 새문안교회, 감리교의 정동교회는 중구 정동(貞洞)을 중심으로 세워졌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19세기말 정동은 외교타운이었지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외교타운 인근에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은 높은 언덕을 택했습니다. 높다란 언덕 위에 종탑까지 45미터가 넘는 건물이 들어섰으니 120여년 전으로선 요즘의 63빌딩, 롯데월드타워가 처음 들어섰을 때보다 더 눈길을 끌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면 왜 한국의 첫 성당들은 도심이 아닌 언덕으로 올라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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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완공된 명동대성당(위)과 6년 앞선 1892년 세워진 약현성당(아래). 두 성당은 오랜 기간 한국 천주교 성당뿐 아니라 개신교 교회 건축의 '모델하우스' 역할을 했다. /장련성 기자, 서울대교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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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정설(定說)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전문가들께 문의도 했지만 ‘왜 첫 성당들이 언덕에 지어졌을까’라는 의문을 풀어줄 시원한 답은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개연성이 높은 이유들은 몇 가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명동성당의 경우는 김범우 등 초기 신자들이 명례방(현재의 명동)에서 처음 신앙생활을 했다는 점, 약현성당은 박해시대의 순교터(서소문순교성지)가 내려다 보인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유럽의 주요 성당에 가면 지하에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진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뜻이지요. 또 한가지는 ‘지상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천국의 형상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화여대 건축학과 임석재 교수)과 ‘세상을 비추는 구원의 등대’(서울대교구 성미술담당 정웅모 신부) 등 가설입니다. 고딕 양식 성당은 높은 첨탑 때문에 멀리서도 잘 보입니다. 여기에 언덕이 기본 높이를 받쳐주면 더 높아 보이겠지요. 시내 어디에서든 우러러 보이는 건물을 보면서 경외심이 들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서울 도심에는 이미 궁궐과 민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넓은 성당터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란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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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중인 명동성당(위)과 완공된 모습(중간). 아래는 남산쪽에서 본 명동성당의 모습. 나즈막한 집들 사이에 우뚝 솟아있다. /서울대교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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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 풍수지리설 들며 2년간 공사 막기도

어쨌든 1887년 한불조약으로 종교의 자유, 특히 천주교 선교 자유가 허용되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신앙의 중심이 될 대성당 터 ‘1순위’로 종현(鍾峴)을 선택했습니다. 종을 엎어놓은 모양의 언덕, 지금의 명동성당 터입니다. 이 자리는 이미 종교 자유가 허용되기 전부터 신자들이 꽤 부지를 매입해놓은 상태였습니다. 건축 전문가인 코스트 신부가 설계에 나섰지요. 코스트 신부는 1892년 서울 최초의 성당인 약현성당을 설계한 분입니다. 그는 약현성당 설계 경험을 바탕으로 훨씬 규모가 크고 한국 천주교를 상징할 건물로 명동성당을 설계했지요.

공사가 순조롭지는 않았습니다. 당장 1888년부터 2년간 조선 정부와 토지 갈등이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1888년 1월 갑자기 땅에 대한 소유권을 억류했습니다. 이유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의 지맥(地脈)을 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풍수지리설이지요.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아마도 새 성당 건물이 궁궐과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초고층건물’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조선 정부는 다른 땅으로 바꿔주겠다는 제안도 했는데, 바로 이 환지(換地) 제안 자체가 성당 건축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위치를 문제 삼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2년간의 분쟁이 끝나고 공사가 재개돼 1898년 마침내 명동성당이 완공됐습니다.

◇매천 황현 “산이 깎이는 것처럼 높고 수만명 수용”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미술담당 정웅모 신부는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은 박해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믿어도 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아 승리의 깃발을 꽂듯이 명동 언덕에 우뚝 솟은 성당을 지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지금 경제적으로는 훨씬 여유가 있겠지만 당시 신자들의 성당 건축에 대한 열정은 비교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지금이라면 불가능할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서울 시민들이 느꼈던 문화적 충격은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의 저서 ‘매천야록’ 1899년 부분에도 잘 묘사됐습니다. “그 교회(성당)는 산이 깎이는 것처럼 높고 수만 명(실제로는 약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것을 세상에서는 종현학당이라고 한다. 세례를 받은 남녀들이 주야로 왕래하여 시장을 가듯 사람들의 수가 많으므로 길을 가던 노인들은 지팡이를 짚고 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떠날 줄을 몰랐다.”

‘노인들이 한숨을 쉬었다’는 표현은 새 종교가 상징적 건물을 통해 얼마나 큰 충격을 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처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건물 하나로 조선 국민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확실한 인상을 각인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개신교 교회에까지 고딕 건축 양식을 전파하는 망외(望外)의 소득까지 올린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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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 촬영한 서울 풍경.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당시의 '초고층건물'이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발간 '눈먼 이들에게 빛을' 수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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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등장 전후해 서울엔 서양 건축물 붐

명동성당이 건축된 19세기말~20세기초 서울에는 서양식 건축물 붐이 일어났습니다. 명동성당보다 앞선 1890년엔 덕수궁 바로 옆에 러시아공사관이 지어졌지요. 명동성당의 등장은 서양식 건축물 붐에 불을 붙였겠지요. 대한제국 황실은 1900년 공사를 시작해 1910년 덕수궁 내에 당시 최대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을 지었습니다. 대한성공회 역시 1922년 서울 정동 영국대사관 바로 옆에 대성당을 착공해 1927년 건립했습니다. 이 건물은 재정난 때문에 미완성 상태로 있다가 1998년 영국 건축가 아더 딕슨의 설계대로 재건축 완공된 스토리도 가지고 있지요.

일제 강점기 이후 일제에 의해 1912년 한국은행 본관, 1925년 서울역 역사(驛舍) 등이 건축되면서 서울에도 서양식 건축물이 흔해졌지요. 백지 상태에서 서양식 건축을 시작했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시대별로 변화해온 다양한 건축 양식이 동시에 서울에서 펼쳐졌다는 점도 이색적입니다. 고딕(명동성당) 로마네스크(성공회성당), 신고전주의(석조전), 르네상스식(한국은행 본점)이 두루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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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주의 양식으로 1910년 건축된 덕수궁 석조전(위)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927년 건축됐다가 1998년 재건축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고딕 양식의 명동성당 건립 이후 서울에는 서양의 다양한 양식 건축물이 들어섰다.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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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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