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고 이건희 삼성 회장/사진=머니투데이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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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향년 78세로 타계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42년 1월9일 경남 의령에서 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운영했기 때문에 이 회장(이하 이 회장)은 어린 시절을 할머니와 함께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이 회장이 여섯 살 무렵 서울 혜화동으로 이사하며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살게 됐다. 이후 6.25 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부산 사범 부속초등학교를 다녔다.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1966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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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 적고 조용한 학생…미래를 내다보는 능력 '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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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은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격으로 그리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는 게 주변 전언이다. 반면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해박한 지식과 독창적 논리로 주변을 놀라게 했단 후문이다.
이 회장이 경영 일선에 뛰어든 것은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하면서다. 1968년 12월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8월 삼성물산 부회장을 맡았다. 이듬해 1979년 2월 삼성그룹 부회장을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에 올랐다.
이 회장은 항상 현재보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탁월했던 경영인으로 기억된다.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진행된 신경영 선포가 대표적인 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혁신을 독려했고 "단 한 개의 불량제품을 만드는 것도 회사를 좀먹는 암적 존재이자 경영의 범죄행위"라며 양이 아닌 질 위주로 패러다임을 바꾼 것도 이 회장이다.
이 선언 이후 이 회장의 주재 해외 간담회는 68일간 이어졌다. 런던, 오사카, 후쿠오카, 도쿄를 오가며 사장단을 대상으로 800시간동안 1800여 명의 임직원에게 350시간을 직접 강의 '삼성의 미래'를 역설했다. 디자인 경영과 여성인력 활용도 함께 주문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삼성 고위 관계자는 "정말 그 당시에는 이 회장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며 "5년 정도가 지난 이후에 기업 환경이나 세상이 이 회장이 얘기했던 방향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역전문가 제도나 입사서류 심사를 폐지한 열린 채용, 여성공채 등은 당시로서는 파격적 발상이었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 다른 기업들이 삼성이 어떻게 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대로 따라하는 형태가 반복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회장은 기업의 사회공헌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강조했다.
1994년 삼성의료원을 설립, 3시간을 기다려서 3분 진료를 받는 현실을 바꿔 놨다. 특히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웠던 영안실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지금의 장례문화가 정착되는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같은 해 국내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삼성사회봉사단’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지금도 삼성 임직원들은 헌혈캠페인, 창립기념자원봉사대축제, 자원봉사대축제, 연말이웃사랑캠페인 등 4대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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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정…2018 평창 올림픽 개최에도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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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은 스포츠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서울대사대부고 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며 전국 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1982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을 맡아 비인기종목인 레슬링을 한국 금메달 밭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고 1996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 됐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이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도 빼놓을 수 없다. 이 회장은 아픈 몸을 이끌고 2009년 시작과 함께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적극 나섰다. 1년 반 동안 170일간 해외 출장을 다니며 IOC 위원들을 만났다. 이 회장이 평창 유치를 위해 전 세계를 누빈 거리는 지구 5바퀴 돌고도 남는다.
이 회장은 아버지의 뜻을 기려 호암상을 제정, 기초학문과 사회봉사 정신이 널리 퍼지도록 하는데도 앞장섰다. 호암상은 1990년 제정된 이후 학술·예술 및 인류 복지증진에 크게 공헌한 인사들을 기리고 있다.
경영인으로서의 이 회장의 능력은 수치로도 입증된다.
1993년 시가총액 2~3조원 규모였던 삼성전자는 불과 2년 만인 1995년 시총 10조원을 넘겼다. 2004년 4월13일 처음으로 시총 100조원을 돌파했고 2012년 3월 시총 200조원 시대를 열었으며 2020년 10월23일 종가 기준 시가총액은 359조원이다.
김성은 기자 gttsw@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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