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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남편 림프종으로 떠나보낸 세계적 종양 전문의, 암 정복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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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세포 제거’에서 ‘암세포 출현 예방’으로 접근법 바꾸자 제안

“변화무쌍, 통제 불능 인간 암세포… 동물 연구로는 한계 명확”


한겨레

클립아트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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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셀: 죽음을 이기는 첫 이름

아즈라 라자 지음, 진영인 옮김, 남궁인 감수/윌북·1만7800원

“암세포도 생명”이라는 드라마 대사가 한때 논란이 됐지만, 암세포가 살아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도 아주 사납도록 변화무쌍하게. <퍼스트 셀> 지은이 아즈라 라자는 수십년간 의료 현장과 가정 모두에서 잔인하리만큼 질긴 암세포의 ‘생명력’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뉴욕 컬럼비아대 의대 교수이자, 골수형성이상증후군과 급성백혈병 분야 세계적 권위자인 그는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림프종 환자의 아내이자 보호자로 암세포의 움직임을 좇았다. 혼신을 다해 암세포를 추적했지만 결과는 매번 패배였다. “암의 복잡성은 기술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 암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불균일하고 무한히 진화하며, 인간의 몸속에서 계속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언뜻 ‘항복 선언’처럼 들리는 이 문장은 패배의 변이 아니다. 오히려 ‘암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첫 구호일지도 모른다. 라자 교수는 암세포의 꽁무니만 쫓아서는 암을 정복하기 힘드니, 암의 낌새를 극초기에 ‘감지’해 초전박살을 내자고 주장한다. 이른바 ‘퍼스트 셀’(first cell) 이론이다. 현재 의료계는 ‘마지막’ 암세포를 찾아 베고(제거), 독을 주입하고(화학요법), 태워버리는(방사선치료) 방식으로 암을 치료하고 있는데, 이런 치료로는 변화무쌍한 암세포를 감당할 수 없으니 ‘첫번째’ 암세포의 ‘흔적’을 찾아내 암이 생기는 일 자체를 방지하자는 것이다. “(암의) 끝을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시작을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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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 교수가 이런 전복적 주장을 펴는 배경엔 그가 의사로, 보호자로 살며 목도한 숱한 비합리, 비효율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분노하는 대상은, 효과는 미약한데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싼 약들이다. 그는 이런 약이 계속 출시되는 이유를 구조적 문제에서 찾는다. 오늘날 암을 치료하는 약물 중 다수는 인간 세포배양 조직 세포주(인간의 암세포를 떼내 연구실에서 배양한 것, 대표적으로 헨리에타 랙스라는 환자의 자궁암세포 조직을 배양한 ‘헬라세포’가 있다), 그리고 이 세포주 또는 인간 암세포를 바로 이식한 동물(쥐) 시험을 통해 그 효과를 검증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인체 기관에서 플라스틱 용기로 옮겨진 세포는 생물 형태학, 유전자형, 표현형, 생물학적 행동의 차원에서 모세포와 몹시 달라져 거의 새로운 종이 되”기에 이런 방식의 실험으로 약물 효과를 검증해서는 불완전하거나 부정확한 결과만을 얻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인간과 면역체계나 세포형태 등이 다른 쥐를 대상으로 실험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조직배양 세포주나 동물 모델로 암의 복잡성을 복제하여 개발하려 한 치료 전략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식의 임상 전 약물 검사 플랫폼을 사용하여 임상시험에 쓰인 약은 95%가 승인받지 못했다. 승인받은 5%의 약 또한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다. 환자의 생존을 고작 몇 달 늘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 다수는 분명 한 번쯤 들었을 것이다. 임상시험에 참가해 얻은 신약 덕분에 암에서 벗어나거나, 최소한 생명을 연장했다는 암 극복기를. 라자 교수는 이런 환자를 예외적인 경우, ‘유니콘’이라 칭하며 이 경우 약물이 “일반 세포건 암세포건 무차별적으로 죽일” 만큼 독성이 강해서라고 반박한다.

‘기회비용’이란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시 보도록 제안하기도 한다. 환자 다수가 효과가 미지수인 약 때문에 심한 부작용을 겪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남은 생을 신약의 “포로처럼” 보내며, 평생 모은 저축을 다 써버린다(지난 14년간 미국에서 새로 진단된 950만건의 암 가운데 거의 절반(42.2%)의 환자가 2년여 동안 평생 모은 저축을 다 썼다고 한다)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기회비용이 적지 않다. 미국 국립암연구소 예산의 70%는 동물·조직배양 세포를 이용하는 연구에 쓰인다. 첫번째 암세포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한 연구에는 단 5.7%만이 배정됐을 뿐이다. 그는 질문한다. “개의 벼룩을 잡겠다며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이 아닐까?”

‘일단 한 번 생성된 암세포는 통제하기 어렵다. 그러니 암세포의 출현 자체를 막는 방식으로 접근법을 달리하자’는 주장은 상식적이다. 그런데도 왜 미국 의료계에서는 지지를 얻지 못할까. (이런 주장을 펼 때마다 지은이는 언제나 격렬한 거부반응을 맞닥뜨린다) 이미 마지막 암세포 제거 위주 치료 흐름에 올라탄 이들은 관행 혹은 기득권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이 아끼는 연구를 자진해서 포기하지는 않는다. 원래 의도와 아무리 멀어졌다고 해도, 연구비와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한 그렇다.” 예방이 치료보다 낫다는 보편적 진리는 이렇게 잊힌다.

라자 교수가 만든 ‘골수형성이상증후군-급성골수성백혈병 조직 보관소’는 예방을 가볍게 여기는 의료계 관행에 자신만은 휩쓸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마치 정식 기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혼자 1984년부터 수집한 환자의 샘플 6만개를 모아둔 일종의 보관함이다. 이 가운데는 림프종을 앓다 세상을 떠난 남편의 세포도 있다. “냉동고의 작은 유리병은 모두 제각각 가슴 아픈 기억을 담고 있다. (…) 내 남편 하비의 일부도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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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라 라자와 지난 2002년 림프종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 하비 프리슬러. 지은이 라자 교수는 책에서 “암 환자와 한 침대를 쓰고서야 이 병이 얼마나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지 알게 되었다”고 썼다. 윌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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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이 유리병 겉면에 붙은 환자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오마르, 퍼, 레이디 N.…. 모두 그가 전력을 다했으나 끝내 암세포 통제에 실패해 세상을 떠난 환자들이다. 라자 교수는 암과의 전쟁에서 이들이 얼마나 용맹했고 자신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증언하며 암 치료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한다.

다만, 지은이가 주장하는 첫번째 암세포의 흔적을 찾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거의 제시되지 않았다는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가 수십년간 모은 6만여종의 샘플은 의료계 관료주의에 묶여 아직 뚜껑조치 열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 책은 퍼스트 셀 연구를 개시하도록 도움을 달라는 필사적 구조신호이기도 하다. 실제 라자 교수는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영상을 통해 “첫번째 암세포를 찾는 연구를 지지해 달라”고 말했다.

건강검진의 계절에 읽으면 특히나 흡수가 빠를 책이다. “암 치료의 진보는 대부분 조기 발견을 통해 이뤄졌다”는 지은이의 설명을 접하면 두렵고 귀찮아서 미뤄뒀던 검진을 당장 예약하고 싶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미약하지만 분명한 항암효과가 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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