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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기자수첩] 원자력 연구자들이 연구실 밖으로 나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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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돈 가지고 장난치는 경영진은 물러나라!"

지난 16일 한국원자력연구원 노동조합원 30여명은 아침 출근길 1시간 동안 대전 본원 앞에 현수막을 들고 집회를 벌였다. 출근하는 경영진을 향한 메시지다. 이들은 수년, 수십년간 원자력연에 몸담으며 우리나라 원자력 연구개발(R&D)에 앞장서온 과학자·공학자들이다.

이날 뿐만 아니다. 지난 7월 말부터 매주 금요일 아침 8시 30분부터 교대로 비슷한 인원을 꾸려 연구실이 아닌 거리로 출근하고 있다. ‘출근투쟁’이라고 부른다. 사정이 여의치 않는 날은 강권호 노조 지부장이 나서서 1인 시위라도 이어간다.

지난주 강 지부장과 몇 차례 전화통화하면서 연구자들이 이렇게까지 하게 된 이유를 들었다. 요약하면 "연구원측이 탈원전 정책을 시행하면서 대형 연구과제 수가 줄었고 결국 우리 연구자들의 고용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에게는 일감인 연구과제의 규모가 줄자 경영진은 기관 처지에 맞는 인건비 책정과 성과 평가 제도를 도입해야 했고, 연구자들은 이를 두고 "돈 가지고 장난친다"고 반발하고 있다. 노조원 1200여명 중 무응답자를 제외한 비율이긴 하지만, 노조의 지난달 자체조사 결과 응답자 700여명 중 현 원장을 지지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1.4%에 그쳤다.

원자력연의 한해 사업 규모는 2017년 5200억원에서 2018년 4700억원, 작년 4300억원으로 매년 10%씩 줄어들고 있다. 경영 실무진은 이를 두고 "연구과제 절벽"이라고 표현했다. 반면 연구에 참여할 연구·기술직 종사자 수는 1300~14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연구원측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다. 원자력연은 지난 20여년간 4세대 원전이라 불리는 차세대 대형 원전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18년 4월 이 사업의 전면 재검토가 결정돼 예산이 2900억원에서 1200억원으로 60% 줄었다.

20여년간 준비해온 사업이 정권이 바뀌었다고 1년여만에 백지화 수순에 들어가면서 그 공백을 메울 준비가 안돼있던 연구원측은 이제서야 ‘혁신 원자력’이라고 이름붙인 신사업 개척에 나섰지만 구체적인 연구과제들도 정해지지 않은, 5~10년 후의 계획에 불과한 상태다.

"우리도 탈원전 그렇게 안 좋아해요." 지난 16일 서울역에서 만난 경영 실무진 중 한 사람은 20여년간 연구자들과 호흡을 맞춰왔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탈원전 정책에 적응하느라 동료들에게 ‘배신자’ 소리까지 듣고 있다고 했다.

경영진 관계자는 "충분히, 꾸준히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데도 노사 갈등은 해결 기미가 안 보인다. 탈원전 찬반이라는 갈등을 넘어,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는지 안 했는지 하는 비교적 작은 문제까지 다투며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강 지부장은 과방위 국정감사가 열리는 20일 대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앞에서 1인 피켓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한국 원전 굴기를 떠받쳐온 원전 연구 두뇌인 원자력연이 탈원전 정책의 속도전에 흔들리고 있다.

김윤수 기자(kysm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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