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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화업(畵業)의 여정, 미적 환희에 닿은 서양화가 김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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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미술기행-55] 서양화가 김영리에게 '침묵'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일본 현대소설가 엔도 슈사쿠(Endo Shusaku. 1923~1996)가 1966년 발표한 작품 '침묵(沈默)'을 떠올렸다.

김영리는 4~5년 전부터 40여 년 화업의 줄기를 이루었던 스토리, 즉 '언어가 제거된' 일련의 침묵 시리즈 'Ah'와 'IN'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사람이 할 짓 못 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림 그리기는 객관적으로 자기를 들여다봐야 하는 도 닦기다.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갈림길을 만나게 마련이다. 몇 번의 하얘지는 경험을 통해 길을 찾은 듯하였고, 그 길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언덕에 들어서자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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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145x112.Tempera(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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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하느님의 부재(不在), 인간이 고난받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존재를 드러내야 할 절대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김영리의 침묵은 찾아야 할 색과 형태가 보이지 않는 상황을 통과해 왔음을 말한다. 침묵 이후에는 실천이 있을 뿐이다. 닫힌 문을 두드리기 위해 기왓장을 들었다면 문을 연 이후엔 기왓장을 버리는 게 당연하다.

김영리는 한국에서는 동양화를 공부했고, 미국 뉴욕에서는 서양화를 공부했다. 동양화와 서양화는 그리는 대상,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 서양화는 인간을 주로 그린다. 캔버스에 물감을 얹는다. 동양화는 관념적 자연을 그린다. 종이와 먹이 만난다. 여백(공간) 배치나 활용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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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145x112.Tempera(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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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뉴욕 소호 거리 아트54 갤러리, 1992년 뉴욕 Z 갤러리, 1992년, 1993년 연속으로 뉴욕 소호 월터 위키저(Walter Wickiser)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다. 먹과 아크릴을 재료로 쓴 반추상 작품들이었다. 이 작업을 할 때 작가가 품은 많은 이야기, 감정 등을 쏟아내듯이 화폭을 채워나갔다. 주된 테마는 도시와 인간이었다. 이주에 따른 어려움과 문화 충격 속에서 학업과 생활을 병행해야 했다.

1996년, 아쉬움이 많지만 10여 년에 이른 호주·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경기도 양평 양자산을 배면에 둔 항금리로 들어왔다. 자연 속에서 자신이 서구화, 도시화가 많이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김영리는 캔버스에 옅게 석고(灰)를 발라 완전히 말린 후 그 위에 템페라(Tempera) 기법으로 작업한다. 템페라는 천연 안료에 달걀 노른자나 벌꿀, 무화과 즙 등을 용매제로 섞어 만든 물감을 사용한다. 자체 발광하며, 내구성이 좋고, 특명하다. 템페라는 서양화 재료지만 색감이나 전체 이미지가 동양화 같은 느낌을 준다. 템페라는 30여 년간 구상 회화에서 벗어나 추상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매개가 되는 재료다. 기존 재료는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 역할을 하였다. 물론 강을 건넜으니 언덕을 넘어야 하며, 뗏목도 잊어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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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145x112.Tempera(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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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두 번의 개인전을 통해 김영리는 자기 자신을 뒤엎는 완전한 변화에 들어간다. 바둑판, 평행선, 사선 등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와 명도가 같은 유사색, 보색 등을 병렬시켜 조화를 추구한다. 자신만의 회화적 리듬 단위는 처음에는 사각형(스퀘어)이었으나 곡면이 둘러싼 입체 알갱이로 변하고 있다. 2016년경부터 양평 거주 20년을 넘기면서 내적 변화가 찾아온다. 작가의 철학과 메시지가 관객에게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바뀐다.

작가의 내면 깊숙한 무의식의 저장고에 자리 잡았던 부유하던 봄날의 아지랑이나 가을을 넘기며 호숫가의 안개나 나무에 서린 이슬은 무언의 모티프다. 이러한 '비언어적 텅 빔'(공·空)이 아리랑 언덕을 넘어가듯 떼지어 나는 나비처럼 '캔버스 채우기'(색·色)가 시작됐다.

아스라이 30여 년 전 공부와 생존을 병행해야 했던 뉴욕의 학교와 가난한 유럽계 이민과 흑인들이 이웃인 브루클린 집을 오가던 내면의 고통, 귀국 후 자연 속에서 독성을 뱉어낸 그 시간들이 시절 인연에 따라 캔버스에 빨려들 듯이 나비의 군무 속으로 흡입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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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165x130.Tempera(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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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프가 붓을 당겨 스스로를 그려나갔다. 삶의 여정에서 차곡차곡 쌓였던 시간과 질서, 기억과 몽환과도 같은 비현실적 이미지들이 스러지고 스며들며 모이고 해체되며 텅 빈 공간으로만 남는 신비를 체험하면서 몰아의 경지에 이른 듯했다. 고요와 침잠의 엑스터시 그 자체였다. 캔버스 앞에는 어린 시절, 포항 오천 너른 과수원 둔덕에서 수풀에 덮인 땅굴이나 또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동굴을 발견한 듯한 아이가 앉아 있곤 했다. 단층 슬래브 지붕 천장을 높인 작업실 박공 모양의 격자 창으로 쏟아져 내린 햇빛에 눈물이 아롱지곤했다. 시공간을 넘나든 자연과 물아일체감(物我一體感)이 '미적 환희(aesthetic rapture)'로 응결되어 캔버스에 내려앉았다.

젊은 시절에도 종종 삼매경(三昧境)에 빠져 스스로의 생각과 습관의 포로가 되어 머리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잠깐 들어왔던 삼매의 영발이 끝났음에도 억지로 그 끝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리가 말하는 '침묵'은 사상과 철학으로서 불교의 선(禪)에 해당되는 듯하다. 서양에서는 선을 명상(meditation)으로, 일본식 발음인 젠(zen)으로 번역해 사용한다. 선의 근원인 디아나(dhyana, 범어 '집중')는 삼매, 사마타(samatha, 止)와 위파사나(vipasyana, 觀)로 구성된다. 즉 불교에서 선의 정확한 의미는 지관(止觀)에 해당한다. 젊은 시절 동양화 그리기를 통한 삼매경은 삶과 화업(畵業)을 오가며 저절로 지관의 확장에 이르렀으며 내면을 토해내는 서양화 재료와 붓터치의 추상은 '정신적 사유'라는 강의 하구에서 만난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시각 예술 작품들은 관객에게 다양한 의미를 전한다. 때로는 작품의 메시지는 마음과 마음을 통해(以心傳心) 전달되지만 작가의 진정한 의도를 관객은 알아채지 못할 때도 있다.

작가가 불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작품이 현실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담고 있다면, 더욱이 디아나의 의미처럼, 묵상과 몰입 속에서 이뤄지거나 순간적인 직감에 따른 창작 행위는 선 사상과 닿을 수밖에 없다. 김영리는 이를 신명(神明)이라고도 표현한다. 신명을 기다린 결과 자신은 빠져 있고, 의지가 생략된 채 어느덧 그분(靈感)이 오셨던 것이다.

시각 예술가가 사용하는 말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한다고 볼 수 없다. 언어, 특히 구어체(口語體)는 불완전하기만 하다. 이미지는 그러한 언어의 불합리성, 불완전성을 보완하고 종종 언어의 지위를 뛰어넘기도 한다. 김영리가 체험한 삼매·침묵·신명은 삶의 여정과 지난한 화업의 일치(渾然一體)에 도달한 자신만의 성소(聖所)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심정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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