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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불평등에 반작용 ‘모유의 정치성’…남성 사회에 날리는 통쾌한 펀치 [김민정의 도쿄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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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유는 권력이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후카자와 우시오의
<유방의 나라에서>

남자가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한다. 혹자는 요즘 여성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남성의 권력을 빼앗는다고 한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이며, 남성차별이라고 외친다. 정말 그럴까? 남성의 삶도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구조상 여전히 여성의 임금은 낮고 취업률에도 격차가 존재한다. 결혼과 임신, 출산을 겪으면 회사에 남는 여성은 현저히 줄어든다. 그것은 평생수입에도 결정적 영향을 준다.

경향신문

여기 두 여성이 있다. 배우 엄마와 사업가 아빠를 둔 ‘후쿠미’, 교수 부모를 둔 ‘나에’. 부유층이 다니는 사립초등학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앙숙처럼 지낸다. 나에는 바쁜 엄마가 수업 참관에 오지 않자, 멋지게 꾸미고 온 엄마가 있는 후쿠미를 질투해, 이지메를 시작한다. 후쿠미는 “돼지! 졸부의 딸!”이라 불린 기억을 오래 품고 살지만, 나에에게는 잊혀진 일이다.

성인이 된 후쿠미는 싱글맘이다. 아빠는 사업 실패 후 행방이 묘연하고, 엄마 역시 집을 떠났다. 고아처럼 자라온 후쿠미는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운다. 호적에 못 올린 아이를 어린이집에도 보낼 수 없어, 일도 할 수 없다. 통장에는 딱 기저귀 한 팩만큼의 잔액이 남아 있다. 나에는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다. 국회의원 아들인 남편은 선거를 준비하고 있으며 장래가 촉망된다. 남부러울 것 없는 나에의 고민은 모유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후쿠미는 유모로 나선다. 말 그대로 모유가 부족한 집을 찾아가 수유를 해주는 여인이다. 나에의 시어머니 마음에 든 후쿠미는 그 집에 상주하게 되고, 나에와 후쿠미의 암투가 시작된다. 마치 봉준호 감독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으리으리한 집에서 남의 아이에게 모유를 주는 후쿠미,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느낌에 이를 악무는 나에. 후쿠미의 존재감이 커가면서 불임증에 제왕절개로 출산한 후 모유도 나오지 않는 나에는 결함품 취급을 받는다. 그녀의 성품이나 능력은 시집에선 쓸모없는 것들뿐이다. 그 집에 머무르는 것이 전부인, 하지만 아이와 떨어질 수 없는 나에는 참고 견디며 그 작은 권력이라도 쥐어보려 분투한다.

아직도 이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모유는 지금도 온라인에서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유의 중요성에 대해 들었을 터이고, 그 부담감에 짓눌린 이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유모의 존재를 과거 일로만 치부할 수 없게 된다.

후카자와 우시오는 2012년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문학상’으로 등단한 후, 매년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오랜만에 등장한 동포 여성작가로 자신의 정체성을 뛰어넘어 다양한 스토리로 독자들을 매료한다. 가진 것이 없어서 공동생활을 시작한 여자들을 그린 <애매한 생활>, 점심을 같이 먹으며 서로를 품평하는 여성들 속내를 적나라하게 쓴 <런치하러 갑시다> 등 치밀한 심리묘사가 특징적이다.

<유방의 나라에서> 전반부는 모유를 통해 권력을, 돈을, 가족을 가져보려는 여성들 심리를 그린 오싹한 추리소설이고, 후반부는 두 여성이 나이 들어 과거를 돌아보며 서로 사과하고 힘을 더해, 남성 사회에 펀치를 날리는 복수극이다.

김민정 재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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