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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우리는 멸종 위기에 처했다" [방구석 연대기 공연예술인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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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우리는 코로나 시대의 생존자들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좁은 방구석에 갇혔습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업무를, 수업을, 식사를, 육아를, 쉼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목숨을 지키는 대가로 가진 것들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사업장이 문을 닫아서, 과외를 쉬어야 해서, 버스가 무서워 택시를 타느라, 단골 식당이 아닌 배달 음식을 먹어서, 낮에도 집에서 에어컨을 켜야 하기에 알게 모르게 비용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것을 ‘코로나 비용’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대책 없이 빠져나가는 이 코로나 비용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코로나의 증인들입니다.

모두가 힘든 이 상황에, 우리의 목소리는 배부른 소리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운이 좋게도 살아 남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존에 드는 비용이 늘어나 ‘부담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불평등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배부른 소리를 더욱 높여 알리고자 합니다. 그렇게 너도 나도 떠들기 시작해 모두의 하소연이 세상에 울려퍼져야만, 진정으로 배고픈 자들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이지 못하는 우리는 여기, ‘방구석’에서 코로나를 증언하겠습니다. 사회로부터 어떻게 코로나 비용을 지불 ‘당’했고, 그래서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를 떠들겠습니다. 우리 5명의 청년들은 지금, 코로나에 맞서기 위한 ‘방구석 연대기’를 써보려 합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경향신문

지난 8월1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SK아트리움에서 무용수들이 2020 수원발레축제 무관중 온라인 공연 리허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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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나는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홍콩 민주항쟁에 연대하는 서울 시민 성지수는 지금 방구석에 앉아 이 글을 쓴다.” 그 글만 보면 나는 팬데믹이 열어젖힌 비대면 시대에 완벽히 적응한 사람 같다. “비록 거리로 나가지 못하고 게시판에 손수 붙이진 못했으나, 온라인을 통해 나의 자리에서” “기후위기를 뚫고,” “코로나19로 인해 축소된 나의 일상”을 위기에서 기회로 바꾸어내는, 그런 건실한 청년 말이다. 아예 없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요즘 나의 밥벌이가 되어주는 많은 일이 온라인 화상 회의를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팬데믹 이후 새로운 플랫폼들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동 시간이 줄어 확보된 일상의 틈을 소소한 취미로 채우는 것 역시 원체 ‘집순이’였던 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이러하다. 나는 사라지고 있다. 나의 존재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는데다 온세상 사람들이 소리 높여 그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진작에 알아서 없어져 버렸어야지 왜 아직도 거기 있는 거냐고, 해롭다고, 좋게 말로 할 때 지금이라도 당장 사라지라고. 나는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해야 할 지 전혀 감을 못 잡은 채 패닉에 빠졌다. 동료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공연예술 연출가다.

‘공연’을 업으로 하는 많은 이들이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연예인들이 자신의 직업이 없어질 것 같아 불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해외의 대규모 공연예술 단체가 파산 위기에 처했다는 뉴스도 들려온다. 문화 산업 분야가 그러하니 상업화되는 걸 적극적으로 거부해 온 소위 기초예술 분야의 배우, 스태프, 극장 노동자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 중의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코로나 비용은 서식지 파괴이고 생태계 파괴다. 나는 멸종위기에 처했다.

자본 대신 기초예술의 파트너 역할을 해왔던 공공 영역은 가장 먼저 예술가들을 밀어냈다. 공공 극장은 안전을 이유로 그 어떤 논의나 기약 없이 공연 연기와 취소를 통보하고 임시 폐관되었다. 사람들끼리 대화를 하거나 마주볼 일이 적어 감염 위험도가 현저히 낮은데 도대체 왜 이렇게 쉽게, 라는 반발은 큰 반향을 만들지 못하고 묻혔다. 창작 공간도 많은 노동자들의 예술 노동의 현장인데 어떻게 정부가 영업 제한을 이다지도 빠르게, 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준비하던 공연이 취소되자 그간 사람들이 모여 연습하고 제작한 비용에 대한 일말의 고려 없이 창작 지원금을 반환하라고 요청받기도 했다.

공연 진행을 온라인 영상 송출로 전환하면 지원금을 보전해주는 것이 현재 유일한 대안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방법은 공연예술업계에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새로운 부담이기도 하다. 우선 공연을 ‘볼만한’ 형태로 찍을 장비와 실력을 갖춘 단체나 개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섭외할만한 자본도 충분치 않다. 공연예술의 표현법은 카메라 앞의 것과 달라 예술교육현장에서도 분리하여 가르치는데, 연극이나 무대용 안무를 주로 해온 이들이 갑자기 매체 연기를 매끄럽게 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혹자는 시대가 바뀌면 예술도 바뀌는 것이 당연한데, 공연예술인들이 ‘노오력’도 안하고 징징대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정부와 여론이 ‘당신 존재가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다면 어렵더라도 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배워 적응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럴 수 없다면 도태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냐고 말이다.

감히 말하건대 그런 노오력이 이 재난을 만들었다. 감염병 창궐을 비롯한 기후위기는 다른 존재들을 착취하면서 이를 비가시화시키고 여기서 얻은 이득을 마치 자신의 성과이자 인류의 발전인 양, 심지어 ‘자연스러운’ 것으로 포장해온 바로 그 논리와 구조가 만든 것 아닌가.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성장을 도모한 인간의 노오력이 북극의 북극곰을 죽이고 호주의 코알라를 죽였다. 야생동물 서식지를 ‘개발’하여 코로나19를 인간 사회로 가져왔다. 수많은 지구 공동체 일원이 살아가던 공간을 지워버리고 밀어내던 바로 그 노오력을, 생태계 파괴를 경험 중인 ‘도시에 서식하는 인간 종, 공연예술가들’에게 제안하다니. 어떻게 감히.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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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함께 작업을 하고 있는 팀에는 공중파 방송에 납품하는 정도의 수준급 영상 작업이 가능한 팀원이 있다. 한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술학교에서 다양한 연기 교습을 받아 매체 연기도 익숙한 팀원도 있다.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팀원 모두가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독한 마음과 학벌지상주의에 편승해서라도 개인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마음만 먹는다면 창작을 이어갈 기반을 탄탄히 만들 수 있다.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 팀은 지금 이 어려운 국면을 극복하고 적응하여 살아 남는 창작집단이 되기에 충분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작품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홀로 살아남아 ‘노오력이 가져오는 보상의 증거’가 될 순 없기 때문이다. 도래한 기후위기는 극복하거나 나아지길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뒤에 남겨두지 않고 정의롭게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으니, 그 길을 찾기 전까진 내가 살아남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니어야 할 테다. 그런데 아직 방법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우선은 이곳저곳에서 살기 너무 어렵다고 죽을 것 같다고 크게, 많이 떠들고 있다. 그렇게 말할 기운도 없이 쓰러진 동료들을 알고 있어서다. 정성과 노동력을 한껏 들여 준비하던 공연을, 관객 수를 줄여서라도 지속하고자 없는 형편에도 열심히 뛰어서 방안을 마련하다가, 종국에는 자기 손으로 공연 취소 공지를 올리고는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당연하지만 기반 시설이 없을수록 더 큰 타격을 받았다. 기존의 도제식 가부장적 시스템을 박차고 나와 “모두에게 안전한 창작 환경을 만들자”며 이런 저런 시도를 했던 이들 말이다.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여 은폐되는 폭력이나 배제를 줄여나가자고,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평등한 관계 맺기를 시도하며 이야기를 교환하던 이들 말이다. 공연예술계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던 폭력적인 관습을 거부하며 이 관습을 따르면 주어지던 어떠한 기반도 같이 거절했던 이들 말이다. 우리의 힘은 만나는 데 있었다. 만나서 회의도 많이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표정과 눈빛과 호흡으로 소통하며 우리는 더욱 강력하고 끈끈하게 연대했다. 공연예술의 본질이 그러하듯.

기후위기 시대에도 팬데믹 정국에도 사람들은 직접 만나고 모여야 한다. 그래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다. 공연예술은 그 중 하나다. 예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직접 드러내고 안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공간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큰 에너지로 공명되는 것을 직접 피부로 감각하며 잠시나마 위로를 얻고 싶은 이들이 있다. 경제적 지표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가치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은 이들이 있다. 비단 공연예술계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여전히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는 노오력을 않고 징징대는 것 아니냐. 내가 해보니까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던데”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묻고 싶다. 당신이 화상 회의에 원활히 참여하게 돕기 위해 누군가가 당신의 자택을 방문하여 프로그램 설치를 돕고 사용법을 설명해야 하지는 않았는지. 당신의 재택근무로 인해 청소, 빨래, 요리 등을 하는 가사노동 시간이 기존의 몇 배로 늘어난 이가 있지는 않은지. 학교나 유치원, 복지 시설 등의 운영 축소 때문에 늘어난 돌봄노동 시간을 누군가가 자신을 갈아넣어 홀로 채우고 있는 건 아닌지. 당신이 안전을 생각하여 덜 움직이는 걸 ‘선택’할 수 있었을 때 당신의 선택을 가능케 했던 여러 배달 노동자와 늘어난 폐기물의 양을 감당하고 있는 청소 노동자의 안전에 대해서는 얼마나 생각했는지. 지금까지 열거한 ‘자신의 안전을 담보로 노동 강도를 높인 이들’이 이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대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성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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