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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가짜 검사실 차리고 ‘화상 보이스피싱’… 유산·적금 등 1억4500만원 뜯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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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원 10여명 전화·카톡 압박… 검사들 서명 찍힌 공문도 보내

“서울중앙지검 윤선호 수사관입니다. 쓰시던 시중 은행 통장이 범죄에 연루됐습니다.”

지난 7일 오전 A씨(25)가 걸려온 ‘발신번호 표시 제한’ 전화를 받았을 때, 수화기 너머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어 “○○○씨(A씨) 통장이 조직 사기 사건에서 대포통장으로 사용됐으니, 공범인지, 정보를 도용당한 피해자인지 밝히기 위해 검찰 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검찰이나 수사관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이 피해자들을 속이기 위해 화상 채팅 배경으로 활용한 가짜 검사실의 내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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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가 보이스피싱을 의심할 때쯤, 남자가 “담당 검사를 연결해 줄 테니 무고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라”고 했다. 이어 전화가 굵은 목소리의 남자에게 넘어갔다. 남자는 고압적인 목소리로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 성재호 검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사건 개요를 설명하면서 “주범을 비롯한 사기 조직원 28명이 이미 검거됐다”며 “수사 상황을 남에게 발설하면 ‘증거 인멸 시도'로 간주해 48시간 구속 수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다음엔 수화기 너머로 ‘손정현 검사’라는 여자가 등장했다.

이후에도 10여명이 전화·카카오톡으로 연락을 해왔다. ‘화상 공증’을 한다며 영상 통화를 통해 자신들이 있는 ‘검사실' 내부를 보여줬고, 검사들의 서명·날인이 있는 공문을 보냈다. A씨 휴대전화에 ‘법무부 공증 앱’도 깔도록 지시했다.

사실 이 모든 게 가짜였다. 검사실은 보이스피싱 일당이 꾸며낸 장소였고, ‘공증앱’의 실제 기능은 A씨의 휴대전화 사용 내역 일체를 일당에게 실시간 전송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A씨는 여기에 속아 사흘간 서울 시내 은행 10여곳을 돌며 1억4500만원을 인출해 ‘내사 담당 수사관’이라는 남성 등에게 직접 전달했다. 어머니 유산을 비롯해, A씨가 7년 이상 모은 청약통장·적금·보험 등 전 재산이었다. A씨는 “제가 보이스피싱에 속을 줄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사기극은 9일 집으로 돌아온 A씨가 ‘속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웃집 전화를 빌려 경찰에 신고하면서 끝이 났다. 이튿날 일당이 걸어온 마지막 전화는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진행된 약식조사는 취소됐고, 직접 검찰청에 출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강동경찰서는 23일 “A씨를 속인 보이스피싱 일당 중 1명을 경기 남부 모처에서 검거했고, CCTV 분석 등을 통해 나머지 조직원들을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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