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기자였다. 언론사 입사시험을 준비한 지 1년 만에 힘겹게 합격했다. 수사기관이 살피지 못한 불의를 해결하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일에 대한 의지도 강했다. 퇴근 후 상사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기삿거리를 생각하며 집에 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수년이 지난 지금 그는 기자가 아니다. 휴직 중이다. 2주에 한 번씩 정신의학과에서 치료를 받는다. 수면제가 없으면 잠들지 못한다. 그는 인터뷰 날에도 신경안정제를 먹고 왔다. 시람을 만나는 일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미투’ 이후 가장 슬픈 건,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됐다는 거예요.”
A씨는 기자 생활 수년간 상사에게 성추행과 성희롱을 당했다. 당시 신입이던 그는 쉽게 피해를 호소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정색하고 몸을 피하거나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접촉 부위를 씻는 게 전부였다. 그는 결국 회사에 도와달라고 신고했다. 회사는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노동청이 “직장 내 성희롱이 인정된다”며 가해자에게 징계 등 조치를 하라 했지만, 회사는 불복했다. 미투 이후 A씨 삶의 반경은 자신의 작은 방 안으로 축소됐다. 상사의 삶은 그대로다. 그 상사는 현재까지 회사에서 기존 직책을 맡고 있다.
인터뷰 한 성폭력 피해자 5명의 삶은 미투 이전과 당시, 그 이후 모두 공통적인 흐름을 보였다. 이들은 성폭력 문제를 두고 소속 집단 내에서 구제받지 못했다. 집단 바깥의 언론과 수사기관을 찾은 뒤에야 해결이 될까 말까였다. 집단 구성원들은 가해자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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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옷차림이 이상해서 그렇다” “왜 이제 와서 말하느냐” “가해자 자살하는 꼴 보고 싶냐”….
피해자들은 피해를 말하는 순간부터 ‘피해자’가 아니라 ‘무고자’로, 또 다른 ‘가해자’로 취급되기 쉬웠다.
“사람들은 ‘무죄추정의 원칙’은 지키지만 ‘피해가능의 원칙’은 무시한다. 피해가 없을 수도 있지만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변혜정 섹스앤스테이크(Sex&steak) 연구소장의 말이다. 그로 인해 피해자의 서사는 끝이 나지 않는다. 피해자의 세계는 한없이 쪼그라들지만 가해자의 세계는 공고하다. 서울대 음대 교수 성폭력 피해자 B씨는 “사람에 대한 믿음도,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신념도 잃고 말았다”고 말했다.
“분리조치만 해줬어도….”
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사건 초기에 가해자의 사과 내지 최소한의 분리조치만 있었어도 공론화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동기 성폭력 피해자인 C씨는 말했다. “피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학교 내 절차를 통해 가해자 분리조치가 될 거라 믿었고,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죠. 하지만 개학 이후 학교에서 가해자를 계속 마주쳐 너무 괴로웠어요. 학교는 규정도, 권한도 없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만 했어요.” A씨는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회사 사람들이 피해 사실을 잘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를 믿었다. 바보 같았다. 회사는 절대 피해자 편에 서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수사기관이 아닌 회사에 먼저 알린 게 후회된다”고 말했다.
유명 미술인 D씨 성희롱 피해자인 프리랜서 예술인 E씨도 관련 기관이었던 서울문화재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는 올해 초 재단에 성희롱 신고를 접수했으나 “D씨의 계약 기간이 종료돼 조사 권한이 없다”는 답만 받았다. 상위기관인 서울시도 규정을 이유로 손을 놓았다. 그가 언론을 찾고 온라인상 공론화에 나선 배경이다. E씨는 말했다. “심리상담을 할수록 사건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제가 사건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언론 보도 이후에야 재단이 조사 기구를 꾸렸더라고요. 진작 했어야 할 일을 왜 이렇게까지 나서야 하는 건지….” 서울문화재단은 언론에 보도(경향신문 6월19일자 8면)가 나가자 사건 재조사 등 대책을 발표했다.
가해자들에겐 ‘위력’이 존재했다. 그들은 피해자보다 높은 직위나 영향력을 가졌다. A씨가 사내에 성추행 신고를 하자 가해 상사는 곧바로 A씨의 근무태도를 문제 삼고 징계를 요청했다. 회사는 매일 A씨에게 출퇴근·점심 시간이 언제인지 보고하라고 했고, 한 달 뒤 A씨를 기자가 아닌 다른 직군으로 전보조치 했다. 근무 장소는 가해 상사와 같은 층이었다. A씨는 말했다. “제가 말을 안 들으면 상사가 불이익을 줬어요. 카카오톡 답을 늦게 하거나 회피하기만 해도 괴롭혔죠. 자신이 저에 대해 매기는 평가가 안 좋으면 회사에서 나가야 한다고 했어요. 성폭력 문제를 얘기하면 제게 피해 줄 게 뻔했죠. 오랫동안 문제제기를 못했던 거죠.”
D씨는 미술계에서 권위 있는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다. 각종 예술계 심사위원을 맡았고 여러 예술 활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E씨가 피해를 입은 것도 D씨가 총괄하는 프로젝트에 들어가려는 과정에서였다. E씨는 D씨의 결정 없이는 프로젝트 참여가 불가능한 ‘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D씨는 회의 명목으로 E씨와 가진 술자리에서 성희롱 발언을 했다. E씨는 말했다. “서울문화재단이 제시한 계약 내용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작업실·장비 대여와 같은 D씨의 개인적인 호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애초부터 D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참여 자체가 어려운 조건이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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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가해자에겐 ‘위력’이 존재
높은 직위나 영향력을 휘두른다
성폭력 신고자를 오히려 징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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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씨 가해 교수도 자신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B씨에게 “넌 내가 아니면 연구도 못한다” “강사 임용은 내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 네겐 추천서를 써줄 수 없다” 등 협박을 했다. B씨는 말했다. “제가 신체 접촉을 불편해하고 거절하면 가해 교수는 ‘잘못된’ 행동이라며 저를 꾸짖었어요. ‘지금까지 이런 학생은 없었다’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느냐’며 저를 오히려 이상한 학생 취급을 했죠. 처음엔 가해 교수의 말만 듣고 스스로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그루밍 성폭력’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됐죠.”
2차 가해
C씨는 피해를 당한 이후 예정된 변론대회를 준비했다. 함께 팀을 꾸린 동료들이 피해를 볼까봐 열심히 임했다. 가해자와 그의 친구들은 C씨의 모습을 보고 “변론대회에 나온 걸 보니 피해자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고 다녔다.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교수 성폭력 피해자인 F씨도 ‘피해자답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어떤 강사는 저를 두고 ‘원래 반바지를 자주 입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교포라서 (성적으로) 개방됐다는 말도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피해가 ‘진짜’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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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이후에도 가해자들에겐
긍정적 평가·이해가 따라붙지만
피해자는 망가진 삶에 고통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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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이후 가해자에겐 긍정적인 평가와 이해가 따라붙지만 피해자에겐 그렇지 않다. 한 비평가는 미술인 D씨의 성희롱 사건을 두고 ‘그가 유능하고 탁월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취지로 글을 썼다. E씨는 “사건을 겪은 후 가해자는 계속 심의위원을 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시를 이어나갔다. 이를 보는 게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F씨는 말했다. “저는 학교 활동, 논문 작성도 열심히 했어요. 저도 실적이 많은데 아무도 언급해주지 않았죠. 좋은 실적은 가해자를 포장하기 위해서만 써요. 어떤 사람들은 피해자를 불쌍하게만 보려고 해요. 피해자는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일부는 피해자들이 실명과 얼굴 등 신원을 공개하지 않았다며 진실성을 의심했다. 미투 당시 얼굴 공개 없이 실명만 공개한 F씨가 말했다. “저는 실명만 공개했음에도 제 배경이 다 공개됐어요. 얼굴을 공개하지 않아도 그렇게 당하는데 얼굴을 공개하면 ‘얼평(외모 평가)’도 당하지 않나요. 왜 애초에 피해자만 존재를 드러내야 하나요. 미국 친구들이 제게 물어요. 왜 가해자는 이름도, 얼굴도 안 밝히냐고. 미국에선 한국과 반대로 가해자 신원이 공개되고 피해자는 최대한 보호를 받아요. 가해자가 공개되면 추가 피해 사례도 찾을 수 있으니까요.”
미투, 그 후
미투 이후 피해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A씨는 미투 이후 자신의 삶에 대해 “완전히 망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극복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저도 피해를 당하기 전처럼 돌아가려고 나름 노력하고 있어요. 방법 중 하나는 글쓰기예요. 피해 사실 자체는 글로 자세히 안 써요. 끔찍한 사실을 기억하는 게 너무 힘드니까. 아직도 악몽을 꾸거든요. 하지만 글을 쓰면서 감정을 발산하도록 노력해요. 사건과 살짝 거리 두기를 하려고 할 때도 있어요.”
B씨는 가해 교수의 연구실을 나온 뒤 몇 년간 하던 연구를 포기해야 했다. 그는 “새롭게 연구 주제를 찾아야 한다. 어떤 교수의 지도를 받을 수 있을지, 학위는 언제 받을 수 있을지 불투명해 막막하다”고 말했다. 인간관계도 많이 달라졌다. 대학원 생활에서 만들어 온 인맥 대부분이 단절됐다. “사실 지금도 제가 왜 이런 일을 겪게 됐는지 억울하기도 합니다. 다만 제가 신고나 고소 등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들의 응원이 많은 위안이 됐습니다. 고통을 잘 통과하고 나면 한층 단단해진 나를 발견할 거라고 믿습니다.”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건 ‘가해자 엄벌’이었다. 피해자는 미투 이후에도 일상 회복이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가해자는 잠시 도피했다가 일상으로 쉽게 복귀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F씨는 말했다. “피해자는 신고한 뒤 많은 것을 잃지만 가해자는 그대로예요. 학교도, 회사도 징계가 강해져야 해요. 그래야 사람들이 조심하니까요. 지금은 그냥 가해자가 휴가 갔다 오는 느낌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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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 ‘가해자 엄벌’을 가장 원한다
성폭력이라는 ‘사고’ 이후에도
피해자의 세계는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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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으로 피해자의 삶을 단일하게만 보지 말아달라는 게 이들의 또 다른 요구다. F씨는 현재 미국의 한 대학에서 조교로 일한다. “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창의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에요. 특이한 걸 연구하는 게 좋아요. 사람들이 한국어랑 영어, 스페인어를 섞어 쓰는 현상이 제 연구 대상이에요.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재미있어서 언젠가 꼭 교수가 되고 싶어요.” E씨는 “사건이 떠올라 슬플 때도 있고, 맛있는 걸 먹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희망을 얻을 때도 있다.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세계는 미투 이전과 이후 변함 없이 유지돼야 한다. B씨는 말했다. “성폭력은 피해자가 잘못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사고’와 같이 여겨지면 좋겠습니다. 피해를 알리고 신고하는 게 인생을 걸고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닌 마땅한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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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지 기자 ming@khan.kr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윤기은 기자 energyeun@khan.kr
이창윤 기자 noru@khan.kr
이창준 기자 jchang@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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