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이슈 고령사회로 접어든 대한민국

신탁, 고령화시대 자산관리 수단이 될 수 있을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1 70대 후반의 A씨는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뒀다. 자신이 죽고 난 후 미혼인 늦둥이 아들의 생계가 걱정이다. 딸들에게는 이미 결혼할 때 집도 사줬고, 외손주들에게도 학비와 용돈을 충분히 지원했다고 생각해 갖고 있는 건물은 아들에게 주길 원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건물의 임대수익을 받고, 죽으면 막내아들에게 온전히 넘겨주길 원했다.

# 2몇 년 전 남편과 사별한 50대 여성 B씨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둘째 아들은 발달장애인이다. 사별한 남편이 남긴 사망보험금 1억원이 있지만 시부모가 그 일부를 요구해 시댁과의 왕래가 편치 않다. “아이보다 딱 하루 더 살고 싶다”는 B씨는 자신이 없어도 둘째 아이가 재산을 지키고, 그걸로 생활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

이들의 사연은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에 접수된 실제 사례다. A씨는 신탁의 한 종류인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신을 수익자로 정해 재산을 관리하고, 사망 후에는 자신이 정한 사람이 수익을 얻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B씨는 아들의 장애 정도가 심해서 법률행위를 대신해줄 성년후견인 제도를 거친 후 장애인신탁을 이용할 수 있다.

‘신탁(信託)’은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믿고 맡기는 것을 뜻한다. 신탁은 위탁자가 수탁자(은행 등 금융기관)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재산 전부 또는 일부에 신탁을 설정하고, 해당 재산을 수탁자에게 이전하면서 시작된다. 재산을 맡은 수탁자는 신탁재산의 권리자가 되어 신탁재산을 관리·처분·운용하고, 신탁재산 또는 그로부터 얻는 수익을 신탁을 설정할 때 정한 수익자(위탁자 혹은 그가 지정한 제3자)에게 지급하게 된다.

신탁재산은 채권자에 의한 강제집행이 금지되기 때문에 위탁자가 파산해도 안전하게 보존된다. 신탁계약을 맺으면 신탁재산의 소유권이 위탁자에서 수탁자(금융기관)로 이전되어 등기부등본에 금융기관의 재산으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물론 채무를 회피하기 위해 악용한 경우에는 소송을 통해 신탁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경향신문

은성수 금융위원장(오른쪽 두 번째)이 7월 2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한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령화 시대 자산관리 방안으로 주목

신탁계약을 체결하면 신탁된 재산은 수탁자인 금융기관에서 바로 집행을 진행해 다른 상속인들의 동의나 협의 절차 없이 지정한 수익자에게 이전된다. 유족 간의 법적 분쟁을 피하고 투명하고 안전하게 상속을 집행할 수 있다. 자신이 정한 대로 재산의 관리·운용을 맡길 수 있고, 돈 이외에도 특허권 등 다양한 재산을 신탁할 수 있다. 증여세 등이 비과세되는 장점도 있다. 이런 장점 때문에 신탁은 부모 없이 홀로 남은 미성년자나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 치매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신탁은 고령자의 금융자산을 후속세대에게 넘겨줘 소비를 진작시키고, 저출생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일본에서 도입한 ‘교육자금증여신탁’(한시 상품)이나 ‘결혼·육아지원신탁’이 그 예다. 조부모가 손주·자녀들을 위해 교육비나 결혼, 출산, 육아자금을 증여할 경우 증여세가 비과세되는 신탁이다. 전진규 동국대 경영대학 교수는 “신탁은 유언대용신탁, 장애인신탁, 치매신탁 등 장기적 관점에서 위탁자의 나이와 소득, 재산 등을 감안해 유연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며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 중인데 재산승계 등 부의 이전과 노후대비를 위한 자산관리에 가장 적합한 금융상품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신탁은 가계자산을 금융시장으로 유입하는 유용한 도구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이준서 동국대 경영대학 교수는 “부유층의 돈을 부동산이 아닌 실물경제로 환류시키는 수단으로 상속·증여와 관련한 신탁만이 아니라 자산운용과 관련한 금전신탁이 활성화할 수 있도록 신탁제도를 손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부동자금의 흡수보다는 노령층의 자산 유동화 측면에 주목했다. 송 연구위원은 “노인이 되면 근로소득이 없어 예금을 빼먹게 되는데 부동산보다 유동화가 쉬운 금융상품을 만든다는 측면에서 신탁의 장점이 있다”면서 “노령층이 신탁을 통해 자신의 금융자산에서 수익을 얻고 이를 유언대용신탁 등으로 자식에게 물려주면 세대 간의 증여가 훨씬 활발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수탁자산 제한, 불완전 판매 가능성 개선해야

신탁은 일반법인 신탁법과 특별법인 자본시장법 내 신탁업법의 규제를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탁제도의 활성화를 위해서 우선 자본시장법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금전, 증권, 동산, 부동산 등 7가지의 열거된 재산으로 신탁 재산 범위를 한정한 것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자본시장법상 금융업에 적용되는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면서 신탁 본연의 유연성이 저하되는 면이 있다”며 “신탁업을 기능에 따라 세분화·구체화하고 신탁 가능 재산의 열거형태에서 포괄적 기술방식으로 변경해 신탁제도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신탁업법을 자본시장법에서 분리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자본시장법이 신탁의 투자대상으로 재산가치를 전제로 해 신탁의 다양한 활용을 막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탄소배출권과 관련한 신탁상품이나 부채를 신탁으로 받아 관리하는 상품이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은행권에서 요구하는 불특정금전신탁 도입에 대해선 신중론이 제기된다. 불특정금전신탁은 고객이 지정한 상품에 투자해 수익을 돌려주는 특정금전신탁과 달리 은행이나 증권사 등 신탁업자가 주식·채권 등에 투자한 뒤 수익금을 되돌려주는 상품이다. 증권사나 자산운용사가 운용하는 공모펀드와 유사한데 투자대상 선택과 운용이 더 자유로워 규제의 차익을 노린 ‘쏠림현상’이 생길 수 있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펀드와 경제적인 기능이 똑같다면 ‘동일기능 동일규제’라는 자본시장법의 대원칙하에서 동일하게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탁은 금융복지로서의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 국내에선 낯설다. 1:1 금융상품이라 금융기관의 광고·홍보가 제한되면서 이런 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송 연구위원은 “펀드처럼 수익률로 유혹하는 건 아니라고 해도 상품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정도의 광고는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탁상품을 판매하는 금융회사들의 불완전 판매를 규제할 필요도 있다. 신탁은 위탁자의 지시에 따라 운용되기 때문에 투자자 보호 측면에선 매니저가 자신의 마음대로 운용하는 펀드와 성격을 달리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특정금전신탁의 경우 일회성 금융상품처럼 거래되는 경향이 있고, 과거 동양증권 사례처럼 증권사 영업사원의 권유로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채 등에 투자하는 불완전 판매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전진규 교수는 “결국 다른 간접금융상품에도 적용될 수 있지만, 신탁업자에게 부과된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 및 충실의무를 선진국 수준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