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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23>하이테크 트랜스포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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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테크. 어느 사전은 이것을 최신 기술과 방법을 적용해 만든 제품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모두가 동의하는 하나의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제품이 이 범주에 드는지 대략 기준을 세워 놓고 있다. 유명 잡지가 뽑은 '2020년 최고 테크 제품'을 보면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하이테크는 종종 혁신의 동의어로 여겨진다. 고품질이나 고성능을 전제하기도 한다. 이런 소비자 인식은 브랜드가 된다. 결국 하이테크는 기업 입장에서 높은 마진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제품에 최신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럼 이런 제품은 하이테크가 주는 고수익이나 오라(후광)와 거리가 먼 것일까. 진정 하이테크 혁신은 태생부터 다른 것일까. 혹 이곳으로 통하는 다른 통로는 없을까. 두 가지 사례를 떠올려 보게 된다.

1990년 질레트는 센서를 내놓는다. 이 두 날짜리 면도기는 최고의 혁신 제품이 된다. 질레트에는 이미 트랙2나 아트라 같은 두 날 면도기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면도날은 고정식이었다. 센서는 면도날에 스프링을 끼워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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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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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이야 새로운 것이 없다. 면도날이 얼굴 윤곽을 따라 움직이면 좋을 줄 누가 몰랐겠는가. 그렇다고 최첨단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이렇게 디자인하고 보니 부품 수가 5개에서 23개로 늘었다. 예전같이 면도날을 접착하니 금세 헐거워졌다. 게다가 두 날 위치도 정확히 조립돼야 했다.

고민 끝에 질레트는 면도날을 레이저로 용접해서 붙이기로 한다. 조립 오차도 0.005㎜로 줄여 정했다. 면도기엔 새로운 기준이지만 그렇다고 매우 어려운 로켓 사이언스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야 하다 보니 이 같은 공정이 가능한 곳은 질레트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면도기는 하이테크 제품이 된다. 이렇게 면도기는 센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다른 사례도 얼마든 있다. 존슨앤존슨의 아큐브는 콘택트렌즈 대명사다. 그러나 이런 아큐브 명성을 쌓은 건 일회용 렌즈 덕이다. 1988년 7월 아큐브는 최초의 일회용 렌즈를 내놓는다. 일주일 동안 빼지 않고 쓴 다음 버리는 식이다. 엄청난 혁신같지만 공기 투과를 위해 얇아진 걸 제하면 예전 소프트렌즈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렌즈 재료도 디자인도 달라진 건 없었다.

실상 난제는 균질성에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갈아 끼는 렌즈의 형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어지럽거나 착용감이 떨어진다. 똑같은 모양으로 성형할 수 있어야 했다. 게다가 한 번 쓰고 버리는 만큼 생산비도 낮춰야 했다. 이 정도 공정관리가 되자 품질 검사 비용이 줄었다. 그리고 생산이 궤도에 오르자 출시 몇 개월 만에 미국 전역 판매가 가능해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경쟁 기업도 곧 일회용 렌즈를 내놓는다. 그러나 공정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6개월이 지난 후에도 출고량은 제자리였다. 이 1년 동안 존슨앤존슨은 이 시장을 한껏 만끽할 수 있었고, 아큐브의 리더십은 이후 바뀐 적이 없다.

우리는 혁신으로 통하는 길이 하나만은 아니라는 점을 안다. 그렇다면 하이테크 제품은 어떨까. 태생이 하이테크인 제품만 고수익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일까. 센서나 아큐브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질레트와 존슨앤존슨는 하이테크로 통하는 다른 통로를 찾아낸 셈이었다. 그리고 이 두 기업은 오늘도 자신이 창조한 하이테크가 만든 고수익을 누리고 있다. 당신 손안의 제품이 하이테크인지 아닌지는 절반쯤 당신 몫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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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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