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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편집국에서] 기본소득이라는 발판 / 안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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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안선희 ㅣ 경제부장

2000년대 초 처음 소개된 뒤 꾸준히 저변을 넓혀왔지만, 한국에서 기본소득이 공론장의 주요 의제로 자리잡은 것은 올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계기는 코로나19 사태로 제안돼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으로 현실화된 ‘재난기본소득’ 아이디어였다. 총선에서도 기본소득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들이 국회에 진출했다. 지난달에는 미래통합당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기본소득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는 발언을 내놓아 세간을 놀라게 했다. 주요 정치인들은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을 표명할 것을 요구받는다. 한때 뜻은 좋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적 이념 정도로 치부되던 기본소득이 이제는 실제 도입 가능성이 있는 정책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뼈대는 간단하다. 사회의 모든 개인들에게 일을 하든 안 하든, 재산이 있든 없든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일정액의 현금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한 발자국만 더 들어가면, 얼마 정도의 돈을 줄지, 그 돈은 어떻게 마련할지, 기존의 복지제도는 놔둘지 없앨지, 왜 일을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돈을 줘야 하는지, 부자에게 줄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은지 등 논쟁거리들이 쏟아진다.

무엇보다 기본소득은 ‘돈이 많이 드는’ 정책이다. 전국민에게 1인당 월 30만원씩 지급한다면 연 187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2018년 기준 국내총생산이 1898조원, 올해 정부 본예산이 512조원인 점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돈이다.

많은 난제들에도 기본소득 논의가 우리 사회에서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이유는 코로나19 사태나 보수정당 인사의 의외적 발언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불쏘시개에 금방 불이 붙는 마른 장작이 우리 사회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로 다시 확인된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제도는 고용시장의 이중구조와 결합돼 불평등 완화에 뚜렷한 한계를 보인다.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고 고용이 보장된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는 국민연금,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에도 안정적으로 가입해 노후와 실업에 대비할 수 있다. 반면 정작 이런 보호가 더 절실한 비정규직, 영세업체 노동자들은 낮은 소득과 불안정한 고용 탓에 지속적인 가입이 어렵다. 나이가 들거나 일자리를 잃어도 혜택을 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정규직의 국민연금, 고용보험 가입률(2019년 8월 기준)은 각각 87.5%, 87.2%다. 비정규직은 37.9%, 44.9%에 그친다.

정보통신기술 등의 발전으로 불안정한 일자리가 더 늘어나고 상당수 일자리가 아예 없어질 것이라는 불안감도 기본소득론이 커지는 데 일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기본소득을 상상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이유는 어쩌면 기본소득론자 필리프 판파레이스가 말했던 ‘만인의 실질적 자유’, 즉 개인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 사회에 부족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무리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고 일하는 환경이 열악해도 생계를 위해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의무가 강제돼 있는 현재 복지 시스템에서는) 신체 건강한 실업자가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지독하게 치사한 고용주가 지독하게 지저분한 일자리에 지독하게 낮은 임금을 주는 일이 사라지지 않게 된다.”(필리프 판파레이스·야니크 판데르보흐트 지음, <21세기 기본소득>)

충분한 액수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기본소득이 제공된다면 이런 일자리를 거부하기가 조금은 쉬워질지 모른다. 이제 고용주도 일자리를 ‘매력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판파레이스 등은 “기본소득은 모든 이들이 굳건히 자기 발로 설 수 있도록 튼튼한 발판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두에게 ‘발판’이 있다면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격차와 불균형이 조금은 평평해질지 모른다. 기본소득이 가야 할 길은 멀지만 기본소득이 던지는 질문들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이다.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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