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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세상읽기] 엔딩 / 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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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진 ㅣ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글이 실리는 지금쯤 그의 장례도 끝났을 것이다. 어떤 일들에 분명한 기, 승, 전, 결을 예상하거나 분명한 주장을 가지고 있던 나는, 엔딩조차 없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들을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있다. “박원순 시장이 실종되었다”는 짧은 메시지를 에스엔에스(SNS)에서 보았을 때 ‘서울시의 어떤 정책이 실종되었나 보구나’라는 상념을 가졌지, 실재하는 사람의 실종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 같은 그의 부재는 현실이었고 삽시간에 알게 된 부재의 이유는 더한 충격이었다. “박원순 시장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현실이 아니기를, 넘쳐나는 가짜 뉴스들처럼 그런저런 해프닝이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그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스스로 사건의 실체를 알 수 없게 만들고 떠났다.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지만, 끝내 격렬한 말들의 소요가 시작되었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호소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라는 ‘자격’조차 얻지 못하고 2차 가해로 난도질당하고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일을 이렇게 만들고 떠난 그가 원망스럽다. 우리가 알던 박원순이기에 더 절망스럽다.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은 소용없고 힘도 없다. 그럴 사람이 아니기에 분노스럽고, 마지막 선택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용서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그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커, 당황스럽다. ‘하루에 딱 두시간만 더 생기면 좋겠다’는 심정일 만큼 바쁜 요즘인데,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며칠을 보냈다. 공적인 인연 몇개를 제외하면 개인적 사연도 없는 사이인데, 슬픔이 지나치게 크다.

서울특별시의 5일장이 발표되었다. 특별한 장례에 대한 각계의 입장이 주장되기 시작했다. 누구의 시점에서 장례를 바라보는지에 따라 입장은 갈렸다. “차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애도할 수 없다”는, “전례 없이 행해져야 하는 것은 서울특별시장이 아니라 고위공직자들이 저지르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에 대한 철저한 진상파악이고 재발방지 대책”이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위계에 의해 피해를 입은 수많은 여성들의 경험과 현재를 위해서, 삶의 길이나 무게 모두 고인보다 짧고 가볍지만 피해자가 살아내야 할 시간을 위해서라도 이 주장은 아주 귀하게 들어야 할 목소리였다. 길고 긴 침묵의 선택을 통해 고인이 한 무거운 고백을, 무엇보다 고인이 살아왔던 삶의 여정을 돌아보더라도 목소리의 울림은 커져야 한다. 추모를 막는 것도 아니며 단지 특별하고 공적으로 치러지는 장례에 대한 이의 제기는 정당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시민장례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슬픔의 무게 추에 마음을 실어주었다. 내 마음을 이해해주고 싶었다. 떠나고 나면 다시는 연결될 수 없는 고인에게 빚을 갚고 싶었다. 그가 늘 옳았던 것도 아니고, 좋았던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때에 했던 결단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삶이 나아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피해자들 곁에 서 있을 때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속절없이 슬펐으며 무기력했다. 이제 더는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아껴야 할 시간 앞에, 그저 마지막 위로라도 남기고 싶었다.

2020년 초여름은 부고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김종철 선생님이 떠났고, 엔니오 모리코네도 떠났다. 인간끼리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위험해지는 단절의 시대에 당도한 애도는 상실과 더불어 외로움으로도 기억되겠지. 모리코네는 스스로 쓴 부고에 가족과 지인들에게 따뜻한 감사 인사를 남겼다. 영화 <미션>의 ‘가브리엘의 오보에’나 <시네마 천국>의 ‘사랑의 테마’ 같은 엔딩이었다. 가슴 빈구석을 훑고 지나는 쓸쓸한 엔딩이나, 박원순은 그런 엔딩도 없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딩 뒤에는 시작이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모리코네의 음악을 듣고 자란 누군가들은 새로운 음악을 만들 것이다. 박원순의 삶과 죽음으로 인해, 격렬했던 우리는 공과 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모두를 슬프고 분노하게 한 죽음이 다시는 없도록 노력할 것이다. 엇갈리는 길고 긴 논쟁의 끝이 피해자의 살을 도려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건 피해자 곁에서 빛났던 박원순의 길이 분명히 아니다.

다시금 고인이 영면에 드시기를, 유족들의 마음에 위로가 있기를 기도드린다. 피해자의 안전과 평화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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