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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아침을 열며]우리는 지금 기회를 낭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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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북유럽의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유엔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지난 3월 발표한 ‘2020 세계행복보고서’의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덴마크는 2위를 차지했다. 그 전에는 오랫동안 1위 자리에 있기도 했다(한국은 61위로 지난해보다 7계단이나 순위가 하락했다).

경향신문

김준기 산업부장


덴마크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탄탄한 사회안전망과 복지체계 때문인데, 이를 ‘유연안전성(Flexicurity)’ 모델이라 부른다. 이 모델은 완전한 노동(고용) 유연성을 허용한다. 기업이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게 되면 꽤 쉽게 해고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계의 반발은 크지 않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기존 소득의 70%에 해당하는 실업급여를 최대 2년간 받을 수 있어 경제적으로 큰 충격을 받지 않는다. 여기에 정부는 해고자가 재훈련을 거쳐 다시 고용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덴마크 노동자들에게 해고는 ‘죽음’이 아니라 약간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거쳐가는 일상적 과정일 뿐이다.

물론 덴마크의 유연안전성 모델은 기업과 국민들이 부담하는 많은 세금을 토대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권과 재계, 노동계가 이뤄낸 사회적 대타협의 산물이다. 한국에서도 외환위기 때인 1998년 노사정위원회가 만들어져 위기 극복과 사회 발전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 논의가 시작됐다. 하지만 노사정위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이름이 바뀐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 사회의 발전과 국민들의 행복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마련된 노사정의 원포인트 사회적 대타협이 민주노총의 내부반발로 협약식 당일 무산된 것은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대화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에 노사정이 마련한 잠정 합의안은 고용안정을 위해 노동계와 경영계, 정부가 조금씩 양보하는 그리 높지 않은 수준의 방안들을 담고 있다.

고용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해고를 쉽게 한다거나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자는 등의 파격적인 내용은 없다. 그럼에도 1998년 노사정위 합의 이후 22년 만에 사회적 합의 타결을 바라던 국민들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사회적 대타협이 안 되는 것은 대화의 핵심 주체인 기업과 노동계의 대립, 그에 따른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분열이 그 어느 나라보다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경영 환경이 어려우니 세금을 깎아주고 고용 유연성도 높여달라고 요구한다. 노동계는 해고는 무조건 안 되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업들 요구처럼 세금을 낮추면 고용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안전망 강화는 불가능하다. 노동계 주장처럼 해고를 금지해 사업주가 경영 환경 변화에 따라 적절한 인력조정을 할 수 없게 되면 기업의 경쟁력과 실적이 떨어져 사회안전망 강화에 써야 할 세금도 덜 걷힌다. 기업이나 노동계나 자신들의 주장만 고집하면 타협이 안 되는 것은 물론 제대로 된 해법도 나오기 어렵다.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있고, 노동자가 소비를 해야 기업도 성장할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사태는 앞으로 우리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 확실하다. 많은 한계기업이나 중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을 것이다. 그에 따라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회 주체들이 자신들만 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함께 죽는 것밖에 남는 길이 없다.

우리 사회가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할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사회적 대타협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전면적 위기를 불러오는 코로나19 사태는 한국이 좀 더 행복한 나라로 가는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낼 기회가 될 수 있다. 거대한 위기 속에서 공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타협해야 한다는 ‘합리적’ 판단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사태에서 ‘사재기’ 현상이 일어나지 않은 유일한 나라다. 마스크 쓰기, 자가격리 등 정부의 방역지침도 가장 잘 준수한다. 그만큼 한국인들은 사회와 국가 시스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다는 얘기이고, 이는 사회적 대타협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노동계와 재계, 정치권이 희망만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기회를 낭비하고 있다.

김준기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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