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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김광일의 입] 박원순, 호숫가에 돌을 던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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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어떤 극단적 선택에도 찬성할 수 없다. 본인이야 오죽했으랴 싶기도 하고, 깜깜한 절벽이 사방에 막혀 있는 것 같은 상황이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극단적 선택은 무책임한 것이다. 특히 남아 있는 가족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는 없다.

박원순 시장은 서울시에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한 사람이다. 일찍부터 여성 친화적 이미지를 내세워 많은 호응을 얻었다. 민주당 정치인 중에 박원순 시장만큼 일찍부터 여성 지지자를 핵심 지지층으로 확보한 정치인도 많지 않다.

박원순 시장은 우리나라에 아직 ‘여성인권’과 ‘성희롱’에 관한 구체적인 개념조차 싹트지 못했을 때 "성희롱은 명백한 불법 행위"라는 인식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다. 여러분, 혹시 지금부터 27년 전인 1993년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기억하십니까. 서울대학교 화학과 실험실에서 핵자기 공명장치 기기를 담당하던 조교 우 모씨가 관리책임자였던 신 모 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발한 사건이다. 기기의 작동법을 가르쳐 준다는 구실로 신 모 교수가 "뒤에서 껴안고 포옹하는 자세를 취했다"는 것이 피해자 측 주장이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이었다. 6년간 법정투쟁이 이어졌고, 결국 신 교수가 우모 조교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최종 판결이 나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희롱도 명백한 불법행위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피해자 측 여섯 사람 변호인단에 박원순 변호사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 변호를 맡았던 박원순 변호사가 고소장에 적었던 마지막 문장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이렇게 돼 있다. ‘호숫가에서 아이들이 장난삼아 던진 돌멩이로 개구리를 맞춘다. 아이들은 장난이지만 개구리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박원순 시장은 그해에 이 사건의 변호인 자격으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상금을 한국여성단체연합에 기부해서 또 한 번 화제가 됐었다. 그랬던 사람이 이번엔 자신이 성추행 고발로 몰려 있다가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 선택을 한 채 발견됐다. 삶이란 아차 하는 순간 벼랑길이란 생각도 든다.

지금부터 18년 전인 2002년에는 ‘우근민 제주 지사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그해 1월 제주 지사 집무실에서 우 지사가 여성 직능 단체장 면담을 하면서 가슴을 만지는 신체 접촉을 했다는 혐의였다. 직사각형 테이블 모서리 부분에 우 지사와 피해 여성이 90도 각도로 앉아서 대화를 나누던 중 왼손으로 피해 여성의 목 뒷부분을 잡고 오른손으로 가슴을 만졌는데 피해자가 그 손을 뿌리쳤다는 내용이다. 우 지사는 "정치적 음해공작"이라고 주장했으나 4년 뒤 1000만원을 배상하라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왔다. 당시 박원순 변호사는 이 사건의 민간 진상조사 위원으로 활동했었다. 그랬던 ‘여성인권 변호사 박원순’이었다.

불과 1년5개월 전인 작년 2월 박원순 시장은 서울시 여성 리더 신년회에 참석했었다. 그 자리에서 박원순 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많은 여성이 저항 주체로서 독립운동(3·1 운동)에 참여했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게 됐으며 그 정신은 1987년 민주화 운동, 2016∼2017년 촛불집회,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미투 운동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나라를 지키고 만들어 온 수많은 여성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성의 기억으로 역사를 만들고, 여성의 역사로 미래를 만드는 서울시장이 되겠습니다." 박 시장은 그날 서울여성플라자 2층 성 평등 도서관에 설치된 ‘서울시 성 평등 아카이브’ 즉 성 평등 기록문서 자료관의 정식 출범을 선언하기도 했다.

오늘 한 신문은 이런 디지털 제목을 달았다. ‘도덕성 타격 힘들었나…비극으로 끝난 최장수 서울시장 박원순’. 박 시장은 이번 주 8일 전직 서울시장 비서였던 A씨로부터 성추행 고소를 당했다는 게 확인됐다. 전직 비서 A씨는 9일 새벽까지 고소인 자격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박원순 시장은 9일 오전10시44분을 집을 나갔다. 그리고 10일 0시20분쯤 서울 북악산 숙정문 부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 십 수 년 동안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 2011년 노무현 전 대통령, 2018년 노회찬 정의당 의원, 2015년 19대 국회의원이기도 했던 기업인 성완종 회장, 2013년 17대 18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국회의원이었던 김종률 의원, 2004년 이준원 파주시장, 작년엔 17대 18대 19대 국회의원을 했던 정두언 의원, 그리고 홍준표 경남지사 시절 경남 정무 부지사를 지낸 조진래 18대 국회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고인들의 마지막 선택에 결코 동의할 수는 없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누구보다 박원순 시장의 마지막 선택이 너무도 충격적이다. 그의 인명사전에는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서울시장, 이 세 가지 표현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성적 범죄의 가해자를 준렬하게 꾸짖어온 인권변호사가 비슷한 혐의로 고발을 당했다는 아이러니 앞에 고인의 유족들과, 피해자와, 박 시장의 지지자들이 느끼고 있을 충격과 혼란도 생각하게 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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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유튜브 ‘김광일의 입’, 상단 화면을 눌러 감상하십시오.

[김광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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