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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문정희 칼럼] 거북이의 이빨이 자라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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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거북에게 있다는 카벙클(carbuncle)이라는 이빨이 떠올랐다. 카벙클로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온 거북이만이 살아서 큰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알은 그만 모래 속에서 썩어 버리고 만다. 인간에게 카벙클은 언어가 아닐까. 언어로 자신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 진정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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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 파블로 네루다는 이런 질문을 시로 썼다.

시는 질문이다. 질문을 통하여 타성과 확신과 폭력 속에 갇힌 사물과 생각을 원초로 돌려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최근 뜻하지 않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고립되어 살면서 나는 문학 초심자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인가?

내 속에 있던 어린아이가 사라져 갔듯이 나의 시혼(詩魂) 또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를 피하려고 마스크로 입을 막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오늘을 사는 너와 나의 자화상이다. 이렇듯 나약한 존재로 허둥거리는 것이 기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실상이기도 하다. 어느 파시즘보다 막강한 힘으로 역병이 전세계를 지배한 것이다.

시는 쓸모없음의 쓸모있음(無用之用)을 보여주는 예술이지만 최근 역병이 창궐한 현실 앞에서 참을 수 없이 무능하고 무력한 것이 시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동안 돈으로 환산 안 되는 시를 쓰는 일이 그래서 오히려 자유롭다고 생각했고 그럼에도 문학이란 최고로 세련된 언어로 나를 확장시키는 일이기에 생애를 걸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역병으로 사방이 막힌 세상에 시와 시인은 크게 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 나름 책 속에서 살았고 호기심을 다해 미지의 땅을 밟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냥 허공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보았다.

결국 소스라치게 깨친 것은 내가 언어를 소유한 정신의 존재라기보다는 나약한 동물이라는 자각이다. 게다가 감염 취약 연령이라는 슬픈 확인까지 하게 되었다.

“말해 줄래, 장미가 발가벗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게 그냥 그녀의 옷인지?// 나무들은 왜 그들의 뿌리의 찬란함을 숨기지?// …”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에 나오는 장미 뿌리의 찬란함을 다시 펼쳐보았다. 장미의 찬란함이란 생명의 찬란함을 말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아름답고 청춘이건 노년이건 모든 순간은 처음 만나는 새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고통스러운 칩거의 시간을 파고들어 가보면 뜻밖에 거기 새로운 해답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사실 우리의 시선은 그동안 너무 외부를 향하고 있었다.

대량 소비와 속도, 경쟁의 악순환 속에서 출세 성공 돈의 가치가 정신을 빼앗아 간 것도 모르고 바쁘다는 것을 무슨 깃발처럼 흔들고 살았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은 파괴되고 생명 본래의 단순한 삶, 절제와 고요함의 가치는 산만함 속으로 파묻혀 갔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가져온 사회적 거리로 인한 고립의 시간은 불편하고 불행한 것이지만 밖으로 향한 시선을 내면으로 되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만 뜨면 쏟아져 들어오는 각종 네트워크와 과잉정보 속에서 멋모르고 걸친 누더기들을 한 겹 한 겹 아프게 벗겨내도 좋을 시간인 것이다.

학자들은 벌써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변화를 말하고 다가올 초정보 아이티(IT) 사회를 여러 방식으로 예측하고 있다.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인간을 옥죄는 네트워크는 바로 곁에 와 있기도 하다.

질 들뢰즈는 그러한 정보 사회에 대해 이미 강한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그는 정보 사회의 비인간을 지적하면서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라고 했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여 정보란 명령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명령은 강제와 폭력을 감추고 있어 그것을 따르다 보면 인간은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이러한 예측이 있는 한편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옌롄커의 말도 주목하게 된다. 코로나 사태가 중국 사회에 남긴 최대 후유증은 조각난 도자기 같은 분열과 붕괴, 포용과 관용 없는 주요 2개국(G2)이라는 위업의 무의미라고 했다. 그는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비유를 하며 오늘날 중국의 독선과 언론을 통제하는 위선을 먼저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 //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을까?// …”

순수한 정신을 되찾고 생명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라는 생각이 절절하게 들었다.

바다거북에게 있다는 카벙클(carbuncle)이라는 이빨이 떠올랐다. 거북이는 한번에 많게는 200여개의 알을 낳아 모래 속에 묻는다고 한다. 모래 속에 묻힌 알은 스스로 내벽을 깰 수 있는 이빨을 키운다고 한다. 카벙클로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온 거북이만이 살아서 큰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알은 그만 모래 속에서 썩어 버리고 만다.

인간에게 카벙클은 언어가 아닐까. 언어로 자신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 진정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상상력 없는 정치, 얇고 진부한 문화, 빈곤한 지성은 언어의 빈곤에서 나온 것이다. 인문학적인 힘이 없이는 진정한 미래를 열 수 없다. 언어는 혁명이다. 누군가는 코로나 이전의 일상을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라. 뿌연 미세먼지 속에 뉴스를 장식하는 언어는 두려움을 퍼뜨리는 핵이거나 이기주의적인 적대의 언어들이 아니었던가.

다행히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어 우리가 안심하고 활보할 수 있는 세상이 돌아온다 해도 그동안 마스크를 쓰고 타인과 거리를 두고 서로에게 극혐을 보낸 시간이 어떤 후유증을 드러낼지 우려되기도 한다.

“오, 나여! 오, 삶이여/ 수없이 던지는 질문들/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이 꼬리를 물고/ 어리석은 자들로 가득한 도시/ 아름다움을 어디에서 찾을까?/ 오, 나여! 오, 삶이여/ 대답은 한 가지/ 네가 바로 여기에 있고/ 삶이 존재하고/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휘트먼의 시집 <풀잎>으로 질문과 대답을 해본다.

연약하고 무력하지만 생명은 위대하고 삶은 아름답다는 것, 시는 폭력에 맞서는 최후의 방패일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나는 계속 보석과 혁명의 언어를 모아 시를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 이외에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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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ㅣ 시인·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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