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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2 (화)

[기자의 시각] 외교관을 부끄럽게 하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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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검은 걸 검다고 말 못하나

조선일보

노석조 정치부 기자


“부끄럽네요.”
얼마 전 한 현직 외교관이 조심스레 기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지난달 30일 제44차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영국·스위스·호주·일본·뉴질랜드·캐나다 등 27국이 공동으로 중국에 ‘반인권 악법’인 홍콩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뜻밖에도 이 대열에서 한국이 빠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현재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이자 2016년 인권이사회 의장국에 선출될 정도로 인권 선진국으로 평가된다. 현 정부에서 장수하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유엔 인권 담당 고위직 출신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이번에 인권을 위해 27국과 한목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을 택했다. 이런 결정에 실망과 부끄러움 그리고 “대체 한국이 어쩌다 이렇게 됐냐”며 분노를 느끼는 외교부 직원이 문자를 보낸 이 외교관 한 명뿐은 아닐 것이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휴대폰 털기’ 검열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런 심정을 토로한 건 예사롭지 않다.
조선일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 2일 오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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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장관은 지난 2일 기자회견에서 이와 관련 “우리의 제반 사항을 고려해 동참은 하지 않았다”면서 “홍콩이 일국양제 하에서 고도의 자치를 향유하면서 안정과 발전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제반 사항’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홍콩보안법 시행 첫날인 지난 1일 하루 동안 370명이 경찰에 체포된 상황에 대해선 “국제사회의 여러 동향과 평가·입장 등에 대해 보고를 받고 분석하고 있다”고 했다. 분석이 언제 끝나는지 분석을 다 하면 답은 할 것인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반인권적 행위라도 중국에 싫은 소리는 ‘제반 사항’ 때문에 못 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무시해도 된다는 게 아니다. 대북 정책 관련 협조 필요성, 경제 의존도 등을 고려하면 중국에 입바른 소리 하기란 여간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막무가내였던 사드 보복 같은 악몽도 떠오른다. 하지만 27국은 이런 ‘제반 사항’을 고려 않는 바보라서 중국을 규탄했을까? 호주 등 대다수 국가도 우리 못지않게 대중(對中) 경제 의존도가 높고 각종 보복을 당했다.

가까운 이웃나라라도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중국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협력하기 위해서라도 ‘흰 것은 희고 검은 것은 검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우리 핵심 가치와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그러지 않고 ‘무슨 색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눈을 감아버리거나 “흰지 검은지 국제사회의 여러 동향과 평가·입장을 보고받아 분석하고 있다”면서 어설픈 변명을 대는 건 부끄럽다. 아마 중국은 고마워하기는커녕 겉으론 “중한(中韓)은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라고 하면서 속으론 ‘쟤들은 뭘해도 잠자코 있을 거야’라며 우리를 얕잡아볼 게 뻔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수인 대접에 차츰 익숙해져갈 뿐이다.

[노석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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