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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문기자 잡담]BLACK의 LIVES만 MATTER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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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인종차별에는 목소리 높이면서

동양인에겐 무례한 스포츠계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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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지 e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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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e스포츠 프로게임단인 젠지 e스포츠(이하 젠지)가 최근 제작했던 유니폼 패치다. 변형된 태극 위에 적힌 ‘BLACK LIVES MATTER’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의미로, 지난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관이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46)의 목을 무릎으로 짓눌러 사망케 한 사건에 항의하는 뜻을 담고 있다.

지난달 27일 ‘2020 우리은행 LCK 서머 스플릿’에 출전한 젠지의 리그 오브 레전드(LoL)팀 선수들은 유니폼 우측 어깨 부위에 이 패치를 붙이고 있었다. 이날 젠지는 공식 트위터에 패치 사진을 올리며 “젠지 KR(한국)은 젠지 US(미국)와 뜻을 함께합니다”라고 적었다. 젠지 한국 지사장 겸 COO(최고 운영 책임자)인 아놀드 허는 “한국에 있는 우리 팀이 글로벌 이슈에 참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BLM(BLACK LIVES MATTER) 이슈에 많은 아티스트와 연예계 인물들이 지지하는 걸 봤다. 이렇게 세계가 하나 되어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 뜻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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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지 e스포츠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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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그러나 정작 한국 e스포츠 팬 대다수는 반응이 차가웠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흑인의 인종차별 범죄가 잇따르는 요즘 상황에서, 태극기를 멋대로 변형해 쓰며 ‘흑인의 권리’를 외치는 것은 도저히 공감해줄 수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실제로 지난달 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알토에선 한국인 남성 노인이 “중국인 바이러스를 원치 않는다”고 외치는 흑인 청년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같은 달 18일엔 미국 뉴욕주 한 상점에서 일하는 20대 한국인 직원이 흑인 손님에게 마스크 착용을 요청했다가 폭행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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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종업원을 폭행하는 흑인./WRG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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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지는 25일엔 공식 트위터에 6·25전쟁 70주년을 기념하는 게시물을 올렸다. 하지만 불과 이틀 뒤 ‘BLACK LIVES MATTER’ 패치가 논란이 되자 이 행위의 진정성마저 의심받게 됐다. 흑인이 한국인을 상대로 벌이는 인종차별이 사회 이슈가 되고 있음에도 태극기를 개조해가며 그들을 공개 지지한 것은, 한국에 대한 이해나 배려가 전혀 없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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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지 e스포츠가 지난달 25일에 올린 게시물./젠지 e스포츠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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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논란이 벌어진 다음 날 “많은 분께서 태극기가 가진 의미와 상징성에 대해 조심스럽지 못했다는 의견을 제시해 주셨다”며 문제의 패치를 고치겠다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BLACK LIVES MATTER’ 본연의 메시지를 그대로 표현하는 패치를 디자인하겠다며 각오를 다졌을 뿐, 한국인들이 느낀 분노와 당혹에 대해선 사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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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지 e스포츠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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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도 사람이 있다

젠지만이 흑인과 동양인을 대하는 태도에 온도 차를 보인 것은 아니다. 지난달 1일 글로벌 게임회사 액티비전 블리자드는 공식 트위터에 “오늘, 그리고 언제나, 우리는 인종차별과 불평등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지지한다. 우리 사회, 어느 사회든 그것들을 위한 곳은 없다. Black lives matter”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해 10월 홍콩 출신 프로게이머 청응와이(활동명 Blitzchung)가 ‘하스스톤 그랜드마스터즈 아시아·태평양(APAC) 지역 시즌2’ 경기를 마친 뒤 진행한 인터뷰에서 방독면을 쓰고선 홍콩 민주화 시위의 주요 구호 중 하나인 “광복홍콩, 시대혁명(光复香港, 时代革命)”을 외치자, “해당 발언은 블리자드나 하스스톤을 대표하는 발언이 아니다”며 그의 그랜드마스터(최상위 플레이어) 자격을 박탈했다. 또한 대회 우승 상금 약 1만 달러(약 1200만원)를 몰수하고 1년간 출전을 정지하는 징계도 더불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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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스톤 프로게이머 청응와이./블리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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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티비전 블리자드는 “중국과는 무관하게, 공공을 불쾌하게 하고 우리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행위를 했다 판단해 내린 조치다”며 해명했다. 하지만 이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없었다. 미국 연방상원의원 론 와이든(민주당·오리건주)은 액티비전 블리자드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그는 서한에 “중국 시장에 굴복할 것인지 표현의 자유 같은 미국적 가치를 지킬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적었다. 전 세계 게이머들은 액티비전 블리자드 게임 보이콧(불매 운동)을 전개했다. 액티비전 블리자드는 결국 4일 만에 청응와이의 출전 정지 기간을 6개월로 줄이고 상금을 모두 돌려줬다. 이들은 징계를 완화하며 “절차가 부적절했고 너무 서둘러 결정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액티비전 블리자드는 모든 사달의 원인을 ‘의사 결정상의 문제’로 돌렸을 뿐, 중국의 눈치를 보다 홍콩 탄압에 동참한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를 회피했다.

많은 이들은 여전히 액티비전 블리자드의 이와 같은 ‘선택적 인권운동’을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인 게임 개발자 마크 컨은 지난달 2일 자신의 트위터에 ‘Black lives matter’를 외친 액티비전 블리자드의 입장문을 인용하며 “홍콩은 빼고”라고 지적했다. 한 게이머는 액티비전 블리자드의 ‘Black lives matter’ 발언을 위선이라며 조롱했다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 계정을 100년간 정지당했다. 사유는 다른 유저 모독 행위와 트롤링(고의적인 약올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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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자드가 한 유저에게 보낸 100년 계정 정지 통보./4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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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중잣대

일부 스포츠 스타도 동양인의 인권은 무시하면서도 흑인의 권리는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 비판을 받았다. 지난해 10월 미 프로농구(NBA) 휴스턴 로키츠 단장인 대릴 모레이(48·미국)가 자신의 트위터에 “자유를 위한 싸움, 홍콩을 응원한다”는 글을 올리자, 중국 운동복 업체 리닝과 상하이푸둥개발은행 등이 로키츠와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NBA를 중계하는 중국 국영방송 CCTV와 텐센트 홀딩스도 로키츠 경기를 방송에 내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LA 레이커스 포워드 르브론 제임스(36·미국)는 “모레이 단장의 발언은 홍콩 이슈에 대해 충분히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고 말하며 중국 옹호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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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릴 모레이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게시물./데릴 모레이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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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올해 5월, 제임스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I CAN’T BREATHE(숨을 쉴 수 없다)’라 적힌 옷을 입은 사진을 올렸다. 플로이드가 경찰의 무릎에 목을 눌려 질식사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메시지였다. 홍콩 민주화 운동가 조슈아 웡(24)은 제임스를 위선자라며 비판했다. 그는 지난달 11일 자신의 트위터에 “르브론 제임스는 중국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의 입까지도 다물게 한다. 제임스가 신경 쓰는 건 그저 돈일 뿐 인권이 아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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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르브론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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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카르도나(28·티후아나·콜롬비아)는 그라운드 위에선 별볼일 없을지언정 이 ‘선택적 올바름’ 분야에선 꽤 이름난 축구선수다. 그는 지난달 3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검은 화면과 함께 ‘BLACK LIVES MATTER’라 적은 게시물을 올렸다. 그러나 카르도나는 지난 2017년 11월 10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A매치 친선경기 도중 하메스 로드리게스(29·레알 마드리드·콜롬비아)의 할리우드 액션 때문에 양 팀 사이에 싸움이 붙자 당시 대한민국 주장이던 기성용(31)을 향해 눈을 찢는 제스처를 한 전력이 있다. ‘동양인은 눈이 작다’는 편견에 기댄 인종차별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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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용에게 동양인 비하 제스처를 취하는 카르도나./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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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축구협회는 그의 행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국제축구연맹(FIFA) 역시 그에게 A매치 5경기 출장 정지와 더불어 벌금 2만 스위스프랑(약 2200만원) 징계를 내렸다. 당시 카르도나는 그가 범한 차별 행위에 대해 공개 사과를 하면서도 “한국이나 특정 인종을 비하할 의도는 없었다”고 못박아 말했다. 그는 3년 뒤인 지난 4월 콜롬비아 매체 데포르테스와 인터뷰에서도 “내 심장과 하나님을 걸고 말하건대,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2월엔 마요르카의 피지컬 코치 다니 파스토르(46·스페인)가 자기 팀 선수인 구보 다케후사를 부르며 양 눈을 찢는 동작을 했다가 논란이 일자 스페인 라리가 사무국 차원에서 사과에 나서는 등, 전 세계 어디에서건 눈 찢기 행동은 명백히 동양인을 비하하는 행동으로 간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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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찢기 제스처를 하며 구보를 불러들이는 파스토르./데일리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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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토트넘에서 손흥민(28)의 팀 동료로 뛰는 델리 알리(24·잉글랜드) 역시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지난 2월 9일 자신의 스냅챗에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영상을 올려 논란이 됐다. 그는 영국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한 동양인 남성을 화면에 잡고 나서 곧바로 손 세정제 쪽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영상엔 “바이러스가 나를 잡으려면 더 빨라야 할 것”이라는 자막도 달았다. 동양인이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숙주라는 인상을 주도록 편집한 것이다. 잉글랜드 축구협회(FA)는 지난달 12일 그에게 한 경기 출장 금지와 5만 파운드(약 753만원) 벌금 징계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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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알리./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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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알리는 지난달 3일엔 카르도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검은 화면과 더불어 ‘Black lives matter’ 문구를 적어 올렸다. 물론 알리가 동양인 비하를 한 시점과 지금은 4개월 정도 간격이 있으니 그 사이에 통렬한 반성을 했을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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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알리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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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언행으로 미루어 보건대, 알리의 흑인 인권운동은 역시나 ‘선택적 올바름’에 불과한 듯하다. 알리는 징계가 확정된 직후 발표한 입장문에서 “징계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내 잘못된 행동으로 상처를 받은 모든 분께 사과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바이러스에 대해 바보 같은 장난을 쳤다”면서도 “FA가 내 행위를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확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모든 종류의 인종 차별을 경멸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의 변명과는 달리 FA는 알리의 인종차별 행위를 명백히 인정했다. FA가 알리를 징계하며 근거로 든 규정은 E3(2)에 정의된 ‘가중처벌이 가능한 위반’이다. 이는 인종, 피부색, 출신, 민족에 대해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언급이 있었을 경우 적용한다. 즉, FA는 인종차별이 발생했다 보고 알리를 처벌했다. 알리는 언론플레이를 하며 이 사실을 가리려 든 것일 뿐이다.

[문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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