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판교 아파트값 상승세가 심상치 않다. 서울 강남권이 최정점에 위치했던 전통적인 집값 서열까지 바뀔 분위기다. 지난해까지는 강남 직주근접(지하철 2호선)이 가능한 잠실 아파트 시세가 판교에 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엔씨소프트, 카카오 등 유명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 몰리는 판교 일자리 질이 강남을 능가하면서 선호 단지는 강남 집값을 따라잡은 것으로 분석된다.
판교신도시 외에도 수원 광교신도시, 화성 동탄신도시 등 든든한 대기업 배후 수요를 갖춘 수도권 신도시 집값이 최근 주춤한 서울 강남·마용성 입지를 위협하고 있는 분위기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기준으로 판교신도시 아파트의 3.3㎡당 평균 매매가는 3544만원으로 서울 평균(2986만원)을 이미 웃돌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고 답답한 서울을 벗어나 쾌적한 환경에서 살고 싶어 하는 젊은 층의 선호도 신도시 강세를 불러오는 요인이다. 신도시 조성이 막바지인 곳은 교육과 편의시설이 대부분 갖춰져 있고 교통 여건도 크게 개선되고 있다. 2003년 지정된 2기 신도시는 성남 판교, 수원 광교, 김포 한강, 화성 동탄1·2, 인천 검단, 평택 고덕, 위례, 양주 옥정, 파주 운정 등 수도권에 10개 도시가 있다. 장재현 리얼투데이 리서치본부장은 “강남 재건축 희망이 사라지고 보유세 부담이 짓누르다 보니 투자 수요가 수도권 신도시로 많이 빠져나가는 분위기”라며 “쾌적한 주거 환경을 원하는 젊은 세대의 트렌드도 신도시 강세 현상의 원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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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 대장주 ‘푸그블’, 잠실엘스를 넘다
경기 성남 판교신도시 대장주로 꼽히는 ‘판교푸르지오그랑블’ 대형 면적 실거래가가 잠실 대표 단지 중 한 곳인 ‘잠실엘스’ 실거래가를 일시적이나마 넘어섰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5월 15일 판교푸르지오그랑블 전용면적 117.51㎡(19층) 매물은 24억500만원에 실거래됐다. 지난 2월 15층 매물이 24억3000만원에 거래된 데 이어 3개월 만에 또다시 24억원을 넘긴 것이다.
반면 지난 5월초 잠실엘스 전용 119.93㎡(9층) 매물은 21억9000만원에 팔려 직전 거래인 지난 4월 물건(24억원)에 비해 2억원가량 떨어졌다. 해당 매물은 증여나 지인 간 거래가 아닌 정상 거래로 알려졌다.
6월 중순 기준 동일 면적 기준으로 잠실엘스 호가는 23억~25억원, 판교푸르지오그랑블 호가는 이보다 높은 25억~27억원 수준이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같은 면적이 잠실엘스는 25억~26억원, 판교푸르지오그랑블은 21억~22억원에 팔렸지만 현재는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성남시 분당구 동판교로에 위치한 판교푸르지오그랑블은 2011년 입주한 준신축이다. 신분당선 판교역에 인접한 948가구 규모 단지다. 실거래가와 아파트 거래량에서도 송파구 잠실 ‘엘리트(잠실 엘스·리센츠·트리지움)’ 단지들을 압도한다. 경기부동산포털에 따르면 판교푸르지오그랑블이 위치한 분당구 아파트 거래량은 올 들어 5월 중순까지 누적 기준 1590건 거래됐다. 성남시 전체 거래량 2441건의 65%에 달하며 같은 기간 엘리트 총 거래량의 두 배에 가까운 수준이다.
물론 단 한 건의 거래로 판교가 잠실을 완전히 넘어섰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잠실 단지들은 6월 말로 예정된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배제 시한을 맞추기 위한 초급매로 인해 일시적으로 시세가 떨어졌던 상태였다. 실제로 5월 중순 들어 동일 면적 기준 잠실엘스 실거래가와 호가 시세는 23억~25억원대로 회복됐다. 그렇다고 해도 수도권 대장주가 강남의 강자 잠실 대표 아파트와 ‘키 맞추기’를 했다는 점은 의의가 크다. 인근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단지 바로 앞에 전철역(판교역)이 있고 도로를 건너면 백화점이 있으며 판교테크노밸리도 도보 10분 거리로 가깝다”며 “실수요자들이 선호하는 대표 단지”라고 설명했다.
다른 관계자는 “판교 역세권에 조만간 두 개의 큰 업무시설이 들어오고 제2테크노밸리 사업도 추진 중”이라며 “인근에 광역급행철도(GTX) 성남역이 들어서는 등 호재가 잇따라 투자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첨단 혁신 클러스터 판교테크노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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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지으러 이사 가던 판교
IT 메카로 거듭나다
인기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주인공 덕선이네가 판교로 이사를 가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덕선이네가 판교로 간다고 하자 이사 업체 직원은 “아무 것도 없는 동네에 농사지으러 가는 거냐”고 덕선이에게 묻는다. 그 정도로 판교는 수도권에서도 ‘불모지’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곳이었다.
농사나 짓던 땅인 판교에서 개발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건 1990년대다. 1998년 5월 성남 도시기본계획이 승인되면서 판교 지역이 개발예정용지가 됐다. 성남시는 1999년 국토연구원에 의뢰해 ‘판교개발 기본구상’을 연구하면서 판교 개발 방안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판교신도시는 수도권 2기 신도시로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과 백현동, 삼평동, 운중동 일대에 조성됐다. 면적은 892만4613㎡에 이르며 수용 인구는 8만8000명(2만9300가구)이다. 2004년 10월에 택지조성 사업에 착수하여, 2009년 1월에 첫 입주가 이루어졌다.
경부고속도로를 기준으로 동판교와 서판교로 나뉜다. 동판교에는 판교테크노밸리와 현대백화점 판교점 등의 업무·상업시설과 주거시설이 있다. 서판교에는 아파트 단지와 단독주택 등이 몰려 있다. 서판교가 조성 초기 은퇴자들이 많이 자리 잡은 전통적 부촌이라면 동판교는 편리한 교통, 직주근접 등을 완벽히 갖춘 제2의 강남이라 부를 수 있다.
판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IT 업체 직원들이 자유 복장으로 출근하는 모습이다. 판교는 애초부터 일산 등 1기 신도시의 실패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자족 기능을 갖춘 도시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판교의 성공은 이 시점에 이미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기 신도시의 경우 주택공급에 우선순위를 두고 추진되는 바람에 자족성 확보가 미흡해 ‘베드타운’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서민 임대주택 공급을 위주로 준비 중인 3기 신도시 역시 그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상황이다.
반면 판교는 철저히 ‘직주근접’을 염두에 두고 개발됐다. 지난 2003년 수립된 판교 기본 개발목표에도 ‘산업기반 제고를 위한 도시지원시설 조성’이란 항목이 들어 있다.
당시에도 판교는 서울 업무지구의 이전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평가됐다. 강남에서 10㎞ 떨어진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판교는 2기 신도시 중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실제 지난 2006년 판교에서 처음으로 공동주택분양이 실시될 당시 ‘로또 분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분양만 받으면 곧바로 1억원 이상의 차익을 남길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에 당시 투기수요 차단 등을 위해 처음으로 인터넷 분양과 사이버 모델하우스가 도입되기도 했다.
이후 판교는 IT 기업들이 몰려들면서 명실공히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됐다. 판교에 IT 기업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기 시작한 건 2010년 이후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6월 현재 시가총액 상위 20위 안에 네이버·카카오·엔씨소프트 등 판교에 자리 잡고 있는 IT 기업이 세 곳이나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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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는 “오늘이 최저가”
판교의 집값 강세는 누가 뭐래도 강남 뺨치는 질 좋은 일자리 덕분이다.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이 2018년 말 기준으로 판교테크노밸리 입주 기업 현황을 조사한 ‘2019년도 판교테크노밸리 실태조사’를 보면 입주 기업 수는 1309개 회사로, 전년보다 3.07% 증가했다. 입주 기업의 매출액을 합치면 총 87조5000억원에 이른다. 이 중 IT 회사가 863개사이고 문화기술(CT) 회사가 175개사인데,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만 전체 기업의 79.3%에 이른다. 좋은 일자리는 구매력을 갖춘 젊은 실수요자를 부른다. 판교테크노밸리 입주 기업의 임직원 6만3050명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30대가 46.52%에 달한다. 그 뒤를 40대(26.23%), 20대(19.52%)가 차지했다. 판교의 앞날은 현재보다 더 밝다. 지방은 한 곳도 유치하기 힘든 굵직한 IT 기업이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최근 삼평동 641 일대 2만5718㎡에 이르는 판교구청 예정부지를 사들이기 위해 나섰다. 감정평가액만 8094억원에 달하는 곳이다. 현재는 성남시가 임시주차장 부지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 제주도에 기반을 둔 카카오는 4월 미래에셋자산운용과 ‘알파돔시티’ 6-1블록 임대차 계약을 했다. 건물 전체를 임차하는 방식이고 계약 기간은 10년이다. 내년 10월 준공 예정이다.
판교를 한 차례 더 업그레이드시킬 알파돔시티는 5조300억원을 들여 13만7497㎡ 대지에 오피스, 아파트, 백화점, 호텔 등을 건설하는 사업이다. ‘알파돔시티’ 프로젝트 완공은 판교의 풍경을 바꾸는 거대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판교는 허브 역할을 하는 곳이 없었다. 판교를 지나는 유일한 지하철역인 판교역이 있지만 역세권 개발이 마무리되지 않아 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IT 기업들이 몰려 있었다. 판교 역세권에 조성되는 알파돔시티가 최종 준공되면 판교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허브가 형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판교는 계속 덩치를 키우고 있다. 현재 판교에는 제2·제3테크노밸리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이다. 제2테크노밸리는 성남시 시흥동과 금토동 일대에 43만㎡로 조성 중이며 공공이 주도하는 1구역은 올해, 민간이 주도하는 2구역은 내년에 준공될 예정이다. 일자리 수요가 늘면서 주거 단지도 계속 들어서고 있다. 판교 대장지구에는 대우건설 ‘판교퍼스트힐푸르지오’와 포스코건설 ‘판교더샵포레스트’가 내년 5월 입주를 시작해 ‘힐스테이트판교엘포레’ ‘판교풍경채’ 등 5903가구가 내년까지 들어설 예정이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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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동탄신도시 “형님 우리도 같이 가요”
2기 신도시의 강세는 비단 판교만의 얘기가 아니다. 광교신도시 역시 인근 삼성전자 배후 수요에 힘입어 마용성 등 서울 핵심지 집값에 육박하고 있다. 광교 대장주인 자연앤힐스테이트는 전용 84㎡ 실거래가가 12억7500만원이고, 호가는 13억5000만원까지 나와 있다.
화성 동탄2신도시 역시 동탄역 인근 동탄역더샵센트럴시티 전용 84㎡가 지난 2월 10억5000만원에 거래되는 등 오름세를 지속하고 있다. 한국감정원의 청약홈에 따르면 현대BS&C가 동탄2신도시 C16블록에 공급하는 ‘동탄역 헤리엇’의 1순위 청약에서 375가구를 모집하는 데 5만6047명이 신청했다. 평균 경쟁률이 149.4 대 1을 나타냈다.
물론 2기 신도시가 최근 상승세를 그린 이유는 서울 규제로 인한 풍선효과도 크다. 서울 전역은 투기지역으로 지정된 데다 12·16 부동산 안정화 대책으로 담보대출이 어렵다. 시세 15억원 이상의 주택을 구입할 때에는 담보대출이 불가하고, 9억 원을 넘기는 주택 또한 9억원 초과분에 대해서는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이 20%만 적용된다.
그간 광교, 동탄 지역은 조정대상지역이라 15억원 이상 주택이라 해도 LTV를 최대 50%까지 적용받을 수 있었다.
100% 자기자금으로 구매금액을 조달해야 하는 서울보다 매입에 대한 부담감이 훨씬 적었다. 다만 이번에 발표된 6·17 부동산 대책에서 수도권 대부분 지역이 투기 지역 또는 조정지역으로 지정된 만큼 이제부터 2기 신도시 단지별 가치가 객관적으로 평가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판교, 광교, 동탄 등 지역이 크게 오른 이유는 정부가 서울 등 지역에만 핀셋규제를 가했기 때문이다”라며 “6·17 대책으로 수도권 전체가 규제 사정권에 들어가면서 수도권에선 실수요가 확실히 받쳐주는 단지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지성 매일경제 부동산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8호 (2020년 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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