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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문재연의 다시, 위안부 문제-③] 기로에 선 위안부 운동…정대협, 무엇이 문제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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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의 본질로 돌아가자. 어떤 접근이 위안부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위안부 문제’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외교’는 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나. 답은 지난 30년간 발전한 위안부 담론을 추적하면 찾을 수 있다.

본 기자는 그 답을 함께 찾기 위해 이번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운동·외교현안·연구분야·국제 여성 인권문제로서 위안부 담론이 발전한 과정을 파헤치고자 한다.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대표적 시민단체로는 한국정신대책협의회(정대협·지금의 정의기억연대)와 한국정신대연구소, 나눔의 집 등이 있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해결과 그 역사상의 중심에는 늘 정대협이 있었다. 정대협은 피해자 증언기록에서부터 배상촉구 운동 등까지 위안부 관련한 다수의 사회운동을 주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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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운동에서 정대협이 차지하는 몫이 크다는 건 양날의 칼이 될 수밖에 없다. 영향력이 큰만큼, 위안부 운동이 보여온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정대협(지금은 정의연)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정대협 ‘7대 해결책’과 국제기구의 한계= 1990년 11월 설립된 정대협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의 사실 인정, 공식 사과, 사실 규명, 책임자 처벌, 위령비 건립, 생존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 역사교육 등 ‘7대 해결책’ 원칙을 세우고 대대적인 사회운동을 벌였다. 정대협은 결성 직후부터 유엔 인권위원회로 나가 전시 성폭력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했다.

당시 정대협은 ‘한국인 위안부’가 아닌 ‘조선인 위안부’ 피해실태를 알리기 위해 북한과 긴밀하게 연대했다. 위안부 문제를 국제 여성인권 의제로 선점한 정대협은 이후 외연을 확장해 일본과 대만,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피해자 또는 시민단체와 연대해 정신대문제 아시아연대회의를 출범시켰다. 또, 1992년 유엔 인권위 산하 ‘소수민족차별 방지 및 보호에 관한 소위원회 및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에서 위안부 실태를 알려 일본제국주의의 전시 성범죄 문제를 의제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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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제기구는 7대 해결책을 풀 힘이 없었다. 법적 구속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6년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인권위원회 여성폭력문제 특별보고관은 보고서를 작성해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전시 성노예제’로 규정했다. 쿠마라스와미 특별보고관은 일본이 전시 위안소제도에 대한 법적 배상과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당시 1970년부터 일본인 위안부들의 폭로와 고(故) 김학순 피해자의 기자회견, 그리고 요시미 요시아키 츄오대 교수가 공개한 일본 방위성의 위안소 운영실태 자료 등을 접한 일본사회도 큰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일본 여론도 악화된 덕분에 1993년 고노담화와 무라야마 담화가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정대협의 이른바 ‘7대 해결책’을 충족하지 않았다.

그나마 무라야마 도이치 일본 내각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진다는 의미로 일본 정부와 국민이 협력해 설립한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위로금을 전달하겠다고 했지만, 정대협은 기금을 ‘전쟁범죄 책임을 회피하고 왜곡하려는 부정한 조직’으로 규정했다.

▶‘7대 해결책’과 피해자들 간의 괴리= 정대협과 피해자 간의 갈등은 이 ‘7대 해결책’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 발생했다. 정대협의 해결책을 지지하는 위안부 피해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다른 피해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기금을 수령한 피해자들의 모임인 ‘세계평화무궁화회’의 심미자 피해자였다. 기금을 수령하지 않은 피해자들과 수령한 피해자들 간의 갈등 틈 속에 정대협은 ‘한쪽’에 손을 들어줬다. 기금을 수령한 피해자들은 나눔의 집에서도 나와야 했다. 단체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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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위안부문제와 아시아여성기금' 디지털 기념관]


갈라치기를 한 건 일본 아시아여성기금도 마찬가지였다. 기금 측은 필리핀에서 최초로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고 기금을 수령한 롤라 로사 핸슨의 장례식장에 직접 방문하고 화한을 보냈다. 반면 기금 수령을 거부한 김학순 피해자의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인권보호에 앞장 서야 할 정대협과 아시아여성기금이 정작 단체의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피해자들을 선택적으로 인정하고, 문제해결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는 고스란히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에게 돌아갔고, 그 사이 대중사회는 위안부 문제를 잊어갔다.

▶피해자의 복합성 인지했던 정대협, ‘순결한 처녀’를 내세우다= 정대협활동이 외교영역에서 일본에 보다 공격적인 서사를 구사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다. 1997년 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공론화되면서 백래시(반작용)의 일환으로 일본에서는 극우적 역사관이 태동했다. 오늘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회의’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결성된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정대협 위안부 피해실태를 대내외적으로 보다 공론화하는 데에 주력했다. 특히, 박물관 건립사업에 힘을 실었다. 나눔의 집이 설립한 박물관도 있었지만, 정대협은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위원회’를 발족해 사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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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이상섭 기자] 서울 마포구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의 담벼락에 '함께 외치는 평화'라는 문구의 이미지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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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개관된 역사관은 정대협의 운동사를 강조하고, 소녀상과 특별전을 통해 ‘일본군에 끌려간 10대 소녀’ 이야기를 실어 강력한 메시지를 발신했다. 그러나 정대협의 공보전략은 위안부 피해의 다양한 면을 다루지 못하고 획일한 피해를 강요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박정애 당시 숙명여대 교수는 “여러 논의가 나올 수 있는 정대협의 활동을 정대협 스스로 박물관 안에 담아놓은 것이 조금은 낯뜨겁기도 하다”며 “민족주의적 독해와 강하게 연결돼 있는 소녀가 전면에 배치된 박물관은 상당히 당황스러웠다”고 지적했다.

정대협도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정의연의 대표로 있는 이나영 교수는 “위안부를 상징하는 기표는 ‘종군위안부’, ‘정신대’, ‘강제연행된 성노예 혹은 조선 처녀’, ‘군위안부’, ‘피해생존자’, ‘할머니’등 다양하게 유동해왔다”며 “이는 운동의 입장을 정리하고 아젠다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학술지 ‘아세아연구’ 제53권 3호에 밝혔다. 일본 역사수정주의에 맞서 위안부 피해이미지를 극대화하는 ‘순결한 소녀’ 이미지는 우리사회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인식에 맞춰 운동성과를 거두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전략이었음을 내비친 것이다.

▶‘7대 해결책’과 외교의 한계, 그리고 소녀상= 위안부 피해자와 ‘순결한 소녀’를 연결시키는 이미징 작업은 위안부 소녀상 설치를 계기로 심화됐다. 2011년 정대협은 수요집회 1000회를 기념으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작은소녀 평화비)을 설치했다.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의 허가와 일본과의 협의 없이 소녀상을 설치하는 건 비엔나 협약위반이라고 반발했다.

일본 보수세력은 정대협 등이 일본의 사과 역사를 인정하지 않은 채 당국을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소녀상 문제를 외교현안으로 끌어올렸다. 정대협은 반발했고, 어느덧 위안부 운동은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인권보호’에 집중하지 않고 상징물로써의 소녀상 보호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소녀상 자체는 우리 여론과 국제사회에 강력한 메시지를 발신했다. 국제사회의 인권의식이 고양되면서 소녀상을 불편해하는 일본의 움직임을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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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외교의 영역’에서 소녀상은 또 하나의 의제로 전락했다. 일본이 위안부 협상조건 중 하나로 ‘소녀상의 이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양자 외교영역에서 위안부 문제를 풀려면 ‘절충’을 해야 한다. 하지만 정대협과 우리 사회에 있어서 위안부 문제는 일본과 절충점을 찾아서는 안되는 문제였다.

2007년 미 하원 본회의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유감표명과 사과를 하라는 결의안이 채택됐음에도 ‘폭발적인 압박’이 되지 못했다. 당시 한미일 3각 협력연대를 중시한 미국 정부는 한국과 일본의 입장 중 하나를 양자택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MB정부는 일본과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중단했다. 절충점을 찾을 수 없다면, 합의 자체를 맺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외교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정대협의 ‘7대 해결책’을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박 전 대통령은 일본을 향한 공격적인 서사를 구사했다. 한미일 정상회담 자리에서 아베 총리를 대놓고 무시하기도 했다. 이에 한미일 협력구도를 중시한 미국이 일본을 압박해 추가적인 사과와 배상을, 한국에는 외교적 절충을 압박했다. 결국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는 ‘소녀상’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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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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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외교부는 소녀상의 이전을 정대협과의 논의하려면 ▷아베 총리 명의의 사과 ▷일본정부 예산에서의 10억 엔 갹출 ▷한일이 공동설립한 재단에서의 위안부 지원 및 기록사업 추진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물은 그동안 박 전 대통령이 대대적으로 홍보해왔던 7대 해결책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정대협과 ‘위안부 굿즈’의 상업화…그리고 흔들린 대의= 2011년 이후 정대협은 ‘소녀상’을 넘어 위안부 피해를 ‘상징’할 수 있는 ‘굿즈’(상품·goods) 판매활동에 열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파생된 게 이른바 ‘사회공헌 기업’과의 협업관계다.

대표적인으로 2012년 설립된 사회적 공헌기업 ‘마리몬드’는 정대협의 후원하면서 상호 지지하는, 공생하는 상업모델을 구축했다.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자 윤미향 전 정대협 대표는 제 1387차 수요집회에서 마리몬드 구매를 독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030 세대를 중심으로 사회적 신념을 반영한 소비를 의미하는 ‘미닝아웃’(Meaning out) 트렌드를 자극하는 긍정적 효과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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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작성한 본 기자도 일본군 위안부 미니 소녀상을 수집하기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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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작용도 있었다. 이른바 소비중심의 위안부 운동은 대중으로 하여금 학술연구와 증언기록, 일본군 위안소의 진상규명 및 피해 당사자들에 대한 지원 등 위안부 문제에 포함돼 있는 다양한 분야의 활동을 ‘외면’하게 했다. 또, 다수의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위안부 상품구매가 ‘피해 당사자들’에게 사용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여기에 현 정의연이 마리몬드로부터 받은 기부금 17억 원 중 7억 8000여 만원을 국세청 공시에서 누락해 논란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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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동상 제막식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제막된 동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동상은 당당한 모습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손을 맞잡은 세 명의 소녀(한국, 중국, 필리핀)와 이들을 바라보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표현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인물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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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 간 정대협/정의연을 중심으로 전개된 위안부 운동은 전시 성범죄 문제를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공론화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대협의 이른바 ‘7대 해결책’은 단기간 내에 이뤄낼 수 있는 사안들이 아니다.

정대협의 7대 해결책을 실현하는 게 우리들의 목표라면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이 더 이상 생존하지 않는 시대가 올 때까지 여러 외교·국제정치적 장애를 점진적·장기적으로 뛰어넘는 전략을 고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만큼 어렵다. 정대협은 ‘피해자들과 연대한 시민운동’으로 위안부 운동의 대표성을 확보해온 만큼, 이 한계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설명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대협은 피해자들에게 이러한 설명을 하는 대신, 단체가 반대하는 ‘대안’을 수용한 일부 피해 당사자들을 고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따금 ‘명분’이 앞선 나머지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역사 그자체를 다채롭게 파헤치기보다는 획일적인 피해 이미지를 내세우는 데에 급급하기도 했다. 위안부 상품 중심의 운동은 비영리단체로서 정대협의 정당성을 약화시켰다.

지난 30년의 위안부 운동과정에서 정대협이 띤 한계는 이제 새단장한 정의연이 뛰어넘어야 한다. 정의연이 위안부 피해당사자들과 재차 대화에 나서서 관계를 재정립하고, 지난 운동과정에서 일으킨 착오를 조정해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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