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는 1931년 어느 날 심한 두통을 앓았다. 하필 친구들과 극장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그는 아내만 극장에 보내고 집에서 쉬었다. 집에 홀로 남아 멍하니 있는데 두통으로 시계가 흐물거리듯 보였다. 달리의 유명 대표작 '기억의 지속(1931)'은 이렇게 탄생했다.
'미술로 읽는 지식재산'의 저자는 '기억의 지속'에 대해 흥미로운 설명을 이어간다. "축 늘어진 시계는 달리 자신의 무의식, 억눌린 욕망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권태로움, 영원한 삶에 대한 염원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개미로 뒤덮인 시계는 죽음을 상징하고, 올리브 나뭇가지 위에 축 늘어진 시계는 많은 비평가들이 발기불능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석한다."
'미술 작품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순간 글이 약간 샛길로 빠진다. 다소 뜬금없이 시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종으로 시간을 알리는 최초의 시계는 1335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제작됐다. 최초의 휴대용 시계는 1500년께 독일 뉘른베르크의 자물쇠 수리공 페터 헨라인이 만들었다.
이어 스위스 시계 브랜드 스와치가 2004년 미국 유통업체 타깃과 특허 소송을 벌인 이야기로 넘어간다. 스와치는 자사 브랜드 시계의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를 침해했다며 타킷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트레이드 드레스'가 무엇인지 글쓴이의 상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비로소 글쓴이가 궁극적으로 알려주고자 했던 목표는 트레이드 드레스였음을 깨닫게 된다. 달리의 '기억의 지속'을 미끼로 던진 다음 돌고 돌아 다소 딱딱할 수 있는 트레이드 드레스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미술로 읽는 지식재산'의 글쓴이는 동부하이텍 등 여러 기업에서 20여년간 특허·지식재산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지금도 반도체 기업 테스에서 지적재산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동시에 동국대학교 지식재산대학원 겸임교수다.
글쓴이는 특허와 지식재산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해박한 미술 지식을 미끼로 던진다. 마치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 나른한 봄날 점심을 먹고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 같은 세설을 한참 늘어놓은 뒤 "잠 좀 깼지, 이제 수업하자"고 말하는 식이다. 다만 이 수학 선생님도 수학 가르치는 것보다 세설 늘어놓은 것을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 미끼로 던진 미술 관련 이야기들은 꽤 흥미롭다. 글쓴이는 개인적 관심에서 수년간 미술사 관련 책을 읽고 공부했다. 책의 맨 뒤에서는 참고서적 120여권을 공개했는데 죄다 미술 관련 서적이다.
지금은 창의력에 바탕을 둔 혁신이 요구되는 시대다. 견고해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진 것 없이 성공하기는 힘들어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견고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성공하려면 지식재산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한다.
캐나다의 장난감 회사 직원이었던 웨인 프롬의 사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셀카봉을 개발해 '퀵 포드'라는 상표로 팔아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곧 중국산 짝퉁들이 쏟아지면서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프롬은 중국산 짝퉁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에 나설 수 없었다. '각국 특허 독립의 원칙' 때문이다. 한 나라에 등록된 특허는 그 나라에 한해 권리로서 효력이 발생한다는 일종의 속지주의 원칙이다. 프롬은 2005년 특허 출원 당시 비용 문제 때문에 미국과 캐나다에서만 셀카봉 특허를 출원했다. 따라서 중국 제품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셀카봉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글쓴이가 던진 미끼는 렘브란트(1606~1669)의 1669년작 '자화상'이다. 셀프 사진이나 자화상이나….
(미술로 읽는 지식재산/박병욱 지음/굿플러스북)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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