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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조르주 브라상, ‘나쁜 평판’을 당당히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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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21) 조르주 브라상(1921~1981)

68혁명 영감 준 시인 가수

직설적 가사·특유의 풍자로

기성 질서 신랄하게 조롱


한겨레

조르주 브라상. 사진 로저 픽,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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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따위 상관없어

스물이건

꼴통이면 꼴통인 거지

꼴값 떨지 마라

곧 죽든 팔팔하든

엊그제 소나기 처음 본 꼴통

고리짝 눈가루 뒤집어쓴 꼴통”

요즘 내가 매일 듣는 조르주 브라상의 샹송 ‘세월 따위 상관없어’의 가사다. 스무살 대학생은 나를 보고 빨강 영감탱이 진보 꼴통이라고 하고, 나는 그를 싹부터 노란 보수 꼴통이라고 부르지만, 꼴통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꼴통들이 서로를 한심하게 보는 것은 사실 세월이나 나이와는 무관하다. 위 번역은 브라상의 평전(<샹송을 찾아서>)을 쓴 장승일 교수(서울대 불어교육과)가 번역한 것을 내가 조금 손댄 것이다. 가령 장 교수가 그 제목을 ‘시간은 상관없어요’라고 번역한 것을 나는 ‘세월 따위 상관없어’라고 고쳤다. 브라상 특유의 풍자를 강조한답시고 그렇게 고쳤지만 혹시 장 교수에게 누가 되었다면 죄송한 일이다. 아래의 다른 노래도 장 교수 번역을 참고해 내가 옮긴 것이다. 가령 ‘넷만 모이면’은,

“떼 지으면 안 돼 어떤 인간이든

넷만 모이면 한심한 패거리니 (중략)

대참극으로 죽은 자들 닮기 싫어

내 힘으로 홀로 살고 싶어

무덤 가는 길 돕겠다고?

난 뭐든 다 나누지만 관만은 안 돼”

음 변화가 거의 없는 곡조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란 말이 유행하지만, 나는 옛날부터 그랬다. 나는 무슨 동창회고 관혼상제고 딱 질색이다. 애들 결혼식도 부조금 받지 않고 아는 사람들하고만 간단하게 했다. 평생을 거의 혼자 살았다. 지금 누구나 마스크를 쓰지만 여기 시골에서는 쓸 필요가 없다. 그러니 마스크를 산 적도 없다. 내 집과 내 밭만 오가고 개나 닭만 만날 뿐인데 무슨 마스크냐? 그래서 브라상의 노래 중에서 가장 유명한 ‘나쁜 평판’이 내 주제곡이기도 하다.

“이름 없이, 마을에서

난 평판이 나빴지

소란을 피우든 숨죽이고 있든

수상한 놈으로 통했지

난 사람들한테 잘못한 게 없어

그냥 나대로 내 갈 길 가면서

그런데 사람들은 싫어하지

자기들과 다른 길 가는 나를

정말 사람들은 싫어하지

자기들과 다른 길 가는 나를

모두들 날 저주했지

벙어리만 빼고 당연히”

201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보다 훨씬 빨리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하면 나를 역시 꼴통이라고 욕할 분들의 모습이 당장 눈앞에 선하지만, 그렇게 내가 평가하는 브라상의 노래 가사를 그대로 옮기면 고상한 독자들이 화를 내기 전에 신문사 쪽에서 먼저 삭제할 것 같아 더 이상 소개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항상 조잡한 단어를 사용한다 해서 악평하는 사람이 많습니다(조잡한 단어에 대한 그의 말 소개는 아예 생략한다). 단지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이 잘못인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는 것만 밝혀둔다.

한겨레

1966년 공연하고 있는 조르주 브라상. 사진 로저 픽,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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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사를 빼면 사실 그의 노래는 모두가 거의 같다. 그냥 지껄이듯이 노래하기에 나는 좋지만 그걸 음악이나 노래라고 할지는 음치인 나도 의문이다. 몇 옥타브가 아니라 한 옥타브, 아니 반 옥타브의 음역대일지 모른다. 그러니 타고난 음치일지 모른다. 그러나 저런 가사의 노래를 하는데 높은 음이 왜 필요할까? 노래에 변화도 거의 없다. 모든 노래가 다 같은 멜로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것은 가사다. 그의 목소리처럼 그의 모습도 보통 사람의 그것이다. 푸르죽죽한 낡은 점퍼나 슈트에 거의 넥타이 없이 역시 낡아빠진 코르덴 바지, 너털 수염에 파이프. 그냥 기타 한대. 표정도 거의 하나, 무표정이다.

브라상은 1921년 프랑스 남부의 세트에서 태어났다. 세트는 보수적인 폴 발레리의 고향이기도 하여 같은 마을에서 보수와 진보가 태어난 것이지만 시인이라는 점에서는 같고, 프랑스의 베네치아라고도 하는 그 작은 바닷가 마을은 시인들의 고향이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브라상이 열일곱에 도둑으로 잡혀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열아홉에 고향을 떠나 파리의 숙모 집에 기거하며 도서관에 처박혀 책벌레로 2년 반을 살다가 스물한살에 두권의 시집인 <경쾌하게>와 <칼로 물 베기>를 낸다. 둘째 시집 마지막은,

“우리가 사는 이 세기는 썩어 문드러졌어

모든 게 비굴함과 저속함에 불과해

가장 위대한 살인마들이

가장 위대한 미사를 드리니

여기에 가장 뛰어난 자들이

가장 위대한 자들

이 말을 알아들은 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머지는 똥이나 먹어라!”

그는 시를 쓰고 작곡을 하면서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 끌려갔다가 휴가차 나와서 숙모의 친구 부부 집에 숨는다. 전쟁이 끝난 뒤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던 브라상은 1952년 카바레 주인이자 가수인 파타슈의 카바레에 출연해 스타가 되고, 위에서 본 ‘나쁜 평판’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작을 발표한다. 그 노래(나쁜 평판)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대혁명 기념일에도

푹신한 침대 속에 뒹굴었지

발맞추어 울려대는 음악

나하고는 무관해

난 사람들한테 잘못한 게 없어

울리는 나팔 소리 안 들었다고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지

자기들과 다른 길 가는 나를

정말 사람들은 싫어하지

자기들과 다른 길 가는 나를

모두들 날 손가락질했지

손 없는 외팔이만 빼고 당연히”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되길 거부

그러나 그 노래를 비롯하여 몇 노래는 방송 불가 판정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매카시 정도는 아니지만,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의 반공주의는 유럽에서도 검열을 강화시켰다. 그 뒤 그는 시인이라는 말을 거부하고 송라이터라고 하면서 예술원 같은 곳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꼬마 피리장이가

성으로 음악을 이끌었네

그 노래가 하도 좋아

왕이 벼슬을 내렸네

‘저는 귀족이 되기 싫어요’

풍각쟁이 답했네

‘벼슬을 받으면

내 소리에 허풍이 끼니까’

그럼 모두 이러겠지요

‘피리장이가 배신했다고’”

하지만 나이가 들어 꼴통이 된 탓인지 1967년에 브라상은 시인 최고의 영예인 프랑스 아카데미의 시작 대상을 받는다. 뾰족모자에 제복에 칼까지 차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는 것은 싫다며 우체부 제복만 사랑한다고 해서 다행이랄까. 그는 68혁명 때 침묵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노래로 그 혁명을 만든 사람의 침묵이었다. 그리고 1970년 이후에는 프랑스 북부인 브르타뉴 시골에 칩거한다. 그 뒤에도 노래를 멈추지는 않았지만, 암으로 1981년에 죽어 고향 세트에 묻혔다.





▶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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