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멸시효 지난 키코 배상은 '불수용'
조붕구 키코(통화옵션계약) 공동대책위원회 위원장이 금감원의 키코 분쟁조정신청에 대한 은행의 배상 조정결정을 발표한 지난해 12월 13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금융권에 따르면 5일 신한은행은 이사회를 열고 금융감독원의 키코 분쟁조정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는 지난 해 12월 키코 사태 관련 판매사인 신한‧우리‧산업‧하나‧대구‧씨티은행 등 6개 은행에 피해기업 4곳(일성하이스코‧남화통상‧원글로벌미디어‧재영솔루텍)에 대한 배상을 할 것을 권고했다. 신한은행 측은 “복수 법무법인의 의견을 참고해 내부적으로 오랜 심사숙고를 거친 끝에 분쟁조정안을 수락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전했다.
이날 하나은행과 대구은행도 이사회를 열고 금감원 조정안 불수용을 결정했다. 하나은행 측은 “장기간의 사실관계 확인 및 법률적 검토를 바탕으로 이같이 결정했다”고 전했다. 대구은행 측은 “해당 업체에 발생한 회생채권을 두 차례에 걸쳐 출자전환 및 무상소각 한 점을 고려해 결정했다”고 밝혔다. 다만 신한‧하나·대구은행은 “금감원이 자율배상 합의를 권고한 나머지 피해기업(145곳)에 대해서는 은행간 협의체에 참여해 성실히 논의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
금감원 분쟁조정안 대거 거부 이례적
키코는 은행이 ‘환헤지(손실회피)’를 목적으로 2008년 금융위기 전에 국내 수출 중소기업들과 체결한 통화옵션계약이다. 기업들은 환율이 미리 계약한 범위 안에서 움직이면 달러를 약정환율에 팔아 돈을 벌지만(풋옵션) 계약범위를 벗어나 움직이면 계약 금액 두 배 이상의 달러를 약정환율에 팔아야(콜옵션) 했다. 2008년 미국 발(發)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원‧달러 환율이 급격하게 상승했고, 키코 상품에 가입한 업체들은 큰 손실을 봤다. 일부 기업은 도산했다. 키코 공동대책위원회는 당시 723개 기업이 환차손으로 약 3조3000억원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한다.
금감원 분조위는 당시 은행들이 고객보호의무를 저버리고 불완전판매를 했다고 봤다. 이에 따라 신한은행(150억원), 우리은행(42억원), 산업은행(28억원), 하나은행(18억원), 대구은행(11억원), 씨티은행(6억원) 등에 4개 업체에 대해 총 256억원의 배상금 지급을 권고했다. 우리은행은 지난 2월 일찌감치 일성하이스코(32억원), 재영솔루텍(10억원) 등 피해기업 2곳에 대한 배상금 지급을 마쳤다.
그러나 나머지 5개 은행 가운데 이날 신한‧하나은행을 포함한 총 4곳이 조정안 불수용 의사를 밝혔다. 지난 3월 씨티은행과 산업은행은 권고안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금감원에 전달했다. 은행권에선 “키코 사태는 민법상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10년)가 지났다”는 점을 주요 이유로 들었다. 판매사의 배상 의무가 없기 때문에 형법 등에 따라 주주에 대한 배임행위가 될 우려가 있다는 설명이다.
윤석헌 금융감독원 원장.〈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분조위 배상 결정은 강제성이 없다. 은행권의 이런 결정은 윤석헌 금감원장엔 부담으로 돌아온다. 윤 원장은 취임 직후 키코 전면 재조사를 지시하며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취임 후 두달 만에 전담반을 꾸렸고, 재조사 착수 1년 6개월 만에 배상비율을 확정했다. 스스로 지난해 감독정책 가운데 가장 잘한 일로 키코 분쟁조정 착수를 꼽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은행을 제외한 은행권은 수차례 걸쳐 권고안 수용기한 연장을 요청하다가 결국 불수용 결정을 내렸다. 은행권이 금융당국 분쟁조정안에 대해 이처럼 대거 불수용 의사를 표명한 사례는 드물다. 금감원에 이어 금융위원회까지 “키코 배상 결정은 배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유권해석을 내렸지만 소용 없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소멸시효와 배임 문제 등 종합적 사안을 고려해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
━
환매중단 라임은 50%대 선지급
반면 이날 은행권은 ‘라임 사태’에 대해서는 선(先)지급을 결정했다. 신한은행은 이날 이사회에서 총 2769억원 판매한 라임자산운용의 크레디트 인슈어드 1호(이하 ‘CI펀드’)에 가입한 고객을 대상으로 원금의 50%를 선지급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해당 펀드 투자자에게 미리 50%의 가지급금을 주고, 향후 펀드 자산 회수나 금감원 분조위 결정 등에 따라 보상 비율이 확정되면 사후 정산하는 방식이다.
우리은행도 이날 이사회를 열고 현재 환매가 중단된 라임자산운용의 플루토 FI D-1호(이하 ‘플루토’)‧테티스 2호(이하 ‘테티스’) 펀드 투자자에 대해 원금의 약 51%를 선지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선지금이 결정된 두 펀드에 묶인 투자금은 약 2600억원 규모다. 현재 금감원 분쟁조정이 진행 중인 플루토 TF-1호(이하 ‘무역금융펀드’)는 선지급 대상에서 제외했다. 우리은행의 라임 펀드 판매액은 3577억원으로 은행 중 가장 많다.
앞서 지난 달 라임 펀드 판매사인 우리‧신한‧하나‧부산‧경남‧농협 등 7개 은행은 은행권 공동 선보상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같은 달 말 열릴 예정이었던 각 은행의 이사회가 줄줄이 연기되면서 보상안 확정이 미뤄졌다. 은행권에선 선보상 결정을 내릴 경우 자본시장법상 손실보전행위를 금지하는 규정을 위반하는 배임행위가 될 우려를 제기했다.
수원여객의 회삿돈 241억원을 빼돌린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라임자산운용 환매중단 사태의 핵심 인물 김봉현 스타모빌리티 회장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지난달 26일 오후 경기 수원남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오고 있다. 뉴시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러나 금감원이 은행권에 “배임 행위로 처벌하지 않겠다”는 비조치의견서를 전달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윤 원장도 지난 달 “(은행들이)배임 이슈를 고민하고 있지만 사적 화해의 경우엔 (선보상을)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은행 이사회 관계자는 “사안 성격상 배임 우려가 제로(0)라고 할 수는 없지만, 논의를 거치며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은행권에서 가장 많은 액수의 라임펀드를 판매한 우리‧신한은행이 이날 선지급을 결정하면서, 다른 시중은행들도 잇따라 선지급을 결정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신한은행 등 라임펀드 판매사 20곳은 현재 라임운용의 부실자산을 처리하는 배드뱅크 운용사를 설립해 자산을 회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성지원 기자 sung.jiwon@joongang.co.kr
▶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