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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서경식 칼럼] 코로나 재난 속의 인문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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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 전에 미-중의 군사충돌이 벌어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상호의존적인 국제사회에서 대국 간의 전쟁 등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성적인 식자’들의 소리다. 하지만 현실은 늘 ‘이성’을 배반해왔다.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언제나 국내정치에서 궁지에 몰리면 더욱 강경하게 배외주의를 선동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다. 그것이 ‘이성’보다 효과가 좋다는 것을 그들은 배웠다.




한겨레

에곤 실레의 <죽음과 소녀>. 최재혁(예술도서 번역·기획편집)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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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대학의 수업은 모두 온라인으로 하고 있는데, 나는 이런 일에 재주가 없다. 내가 ‘예술학’ 수업에서 다루는 작가나 작품은 필연적으로 전염병과 깊이 관련돼 있다. 과거를 뒤돌아보면, 인간 세상이 전염병으로 죽음의 짙은 그림자에 뒤덮여 있을 때 뛰어난 미술작품이 만들어졌다. 지난번에 다룬 피터르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도 그러했다. 이번에는 20세기 초 빈의 화가 에곤 실레의 <죽음과 소녀>(그림)를 소개해 보겠다.

실레의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8년부터 1920년에 걸쳐 크게 유행한 인플루엔자(속칭 ‘스페인 독감’)가 한창일 때 그려졌다. 그 전염병으로 세계 인구의 4분의 1에 상당하는 5억명이 감염됐고, 1700만명에서 5000만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인류역사상 최악의 감염증 가운데 하나다. 실레 자신도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죽음과 소녀>는 아름다운 소녀를 죽음의 신이 억지로 데려가려는 중세 이래의 전통적인 도상(圖像)이다. 페스트의 대유행과 궤를 같이해서 등장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호소는 현세의 번영이나 융성은 일시적인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그것을 잊지 말라는 기독교 교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의 이 그림에서는 역할이 역전돼 오히려 소녀가 죽음의 신에게 매달리는 듯이 보인다. 죽음의 신은 실레 자신이며, 소녀로 묘사돼 있는 것은 그의 연인 발리 노이칠. 발리는 실레가 이별을 고하자 간호사로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다 병사했다. ‘스페인 독감’의 대유행은 지금의 신종 코로나 재난과 매우 유사하다. 역사의 교훈에 따르자면, 이런 사건과 연동해서 일어나는 것은 불황이요, 파시즘이나 전쟁이다.

왜 전염병의 참화 속에서도 인간에겐 예술이 필요할까. 왜 거기에서 뛰어난 예술이 만들어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피하기 어려운 죽음’의 낌새를 절박하게 느끼면서 죽음의 의미를(바꿔 말하면, 삶의 의미를) 스스로 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극화된 사회일수록 재앙은 가난한 자, 약한 자, 고독한 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큰 희생을 강요한다. 미국 통계에서도 백인계에 비해 뚜렷하게 아프리카계, 중남미계의 감염률, 치사율이 높다. 이런 재난 속에서야말로 계급적, 인종적, 성적, 기타 온갖 차별이 드러난다. 경찰관이 무저항의 아프리카계 남성의 목을 무릎으로 압박해 사망케 한 사건 뒤 지금 미국 전역에서 격렬한 항의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운동은 반트럼프 정권 색채가 짙고, 트럼프는 군을 동원해 진압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이 사건은 ‘코로나’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듯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몸으로, 내가 딱하게 여기는 것이 학생들이다. 교육이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얼굴을 서로 마주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서 대화하는 것(‘신체성’)이 기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같은 텍스트로 강의를 해도 담당 교원 개개인이 지닌 설득력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 ‘신체성’ 때문일 것이다. 내가 맡고 있는 ‘예술’과 같은 인문계 과목에서는 특히 그렇다. 사람은 언어화된 정보에만 의존해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상대의 표정, 몸짓, 목소리 상태 등의 축적을 통해 신뢰감(또는 불신감)을 키우게 된다.

미술사적인 또는 기법적인 정보나 지식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작품을 대하면서 거기에서 언어적 정보를 넘어서는 것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예컨대 미켈란젤로에 관한 연구나 정보는 필요하고 또 유익하지만, 그것은 실제 작품(예를 들어 ‘론다니니의 피에타’)이 우리에게 직접 주는 감명을 대신할 수 없다. 이것은 고야도 고흐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에게는 가능한 한 천천히 자유로운 정신으로 작품과 대화하고 타자(교원인 나나 다른 학생)의 감상이나 의견을 접함으로써 언어정보만으로는 깨닫지 못했던 것을 발견해주기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해온 인문학 교육으로서의 ‘예술’의 기본적인 어프로치인데, 지금 그것이 밑바닥부터 위협받고 있다. 긴급피난으로서의 온라인교육의 필요성이나 그 이점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으나, 그래도 지금 지속되고 있는 사태는 장기적으로 볼 때 교육에 파괴적인 영향을 남길 것이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연결,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인간성이라는 개념을 파괴할지도 모른다. 지금이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의 전면적인 도입에 호기라고 외치는 자도 있으나, 나는 도저히 그렇게 낙관적일 수 없다. 다치면 아프다는 것을 신체적인 감각으로 상상할 수 있고, 그 상상을 타자와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없어지면 인간 사회는 어떻게 될까. 그것은 강자의 약자 지배, 침략과 전쟁에 지극히 유리한 사회일 것이다.

다가올 세계적인 대불황도 거기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번 팬데믹은 지극히 글로벌한 현상이어서 각국은 자국 중심주의로는 이 재앙을 이겨낼 수 없다. 이것은 분단에서 새로운 연대로 갈 호기다. 반드시 호기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9일, 세계보건기구(WHO)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했다. 11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실정에 대한 비판의 예봉을 딴 데로 돌릴 목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국제사회(특히 미국 자신)가 오랜 세월 배양해온 공중위생상 국제협력의 틀을 파괴하겠다는 선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4년 전에 “멕시코인 대다수는 범죄자이기 때문에 벽을 쌓아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강간범과 같다”는 등 차별과 배외주의를 부채질했다. 그런 선동은 명백히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에 위배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사회는 실상이야 어떠하든 이념적 원칙으로서는 인권존중을 전제로 삼아 공유해왔다. 하지만 트럼프 정권은 그 전제를 과거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 세계보건기구 탈퇴 선언도 그런 파괴 행위의 일환이다.

이런 행위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정권은 7월에 팔레스타인 자치구 내의 유대인 정착지를 합병할 예정이다. 이런 횡포를 자행하려는 것은 트럼프 정권이 강력하게 그것을 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미국의 기독교 복음파 등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네타냐후를 밀어주고 있다.

대통령선거 전에 미-중의 군사충돌이 벌어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상호의존적인 국제사회에서 대국 간의 전쟁 등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성적인 식자’들의 소리다. 하지만 현실은 늘 ‘이성’을 배반해왔다.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언제나 국내정치에서 궁지에 몰리면 더욱 강경하게 배외주의를 선동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다. 그것이 ‘이성’보다 효과가 좋다는 것을 그들은 배웠다. 전염병, 불황, 전쟁은 근대사에서 항상 하나의 세트로 인간들을 덮쳐왔다. 과연 이번만큼은 예외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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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ㅣ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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