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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독도이야기] 일본 쪽으로 기울다 마지막에 중립 선회한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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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민의 독도이야기]

[5]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과 독도 (하)

‘러스크 서한’, 日 자료에 근거해 ‘독도는 일본 땅’

한·일 갈등 고조되자 덜레스가 ‘美는 불개입’ 선언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다. 수많은 집념어린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쟁점을 놓고 격론과 공방이 오간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주인공인 한·일 양국뿐 아니라 심판 격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가 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본격화된 ‘독도 문제’의 역사와 현황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매주 일요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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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8월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로 "우리의 정보에 따르면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서한을 한국에 보내온 러스크. 1960년대 케네디-존슨 정부에서 8년간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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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업무를 논의하고 있는 덜레스 국무장관(오른쪽). 그는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고조되자 1953년 12월 "미국은 독도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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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 글에 썼듯이 한국이 대일(對日) 평화조약 초안을 전달받은 것은 1951년 3월 27일이었다. 미국이 1946년 8월 이래 내부적으로 검토해 오던 대일 평화조약 초안을 다른 국가들에게 처음 공개할 때 주요 연합국 14개국, 일본과 함께 그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한국이 연합국의 일원이 아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일 평화조약 초안의 중요성을 파악한 한국 정부는 4월 16일 한국의 답신서를 작성할 ‘외교위원회’를 구성했다. 장면 국무총리, 변영태 외무부장관, 김준연 법무부장관, 홍진기 법무부 법무국장 등 정부 측 인사들과 유진오 고려대 총장을 비롯한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유진오는 제헌헌법을 기초한 법학자로 정부 수립 후 초대 법제처장을 역임해 법률 실무에도 밝았다.

외교위원회가 만든 한국의 답신서는 1951년 4월 27일 미국 국무부에 송부됐다. 답신서에는 ▲한국에게 평화조약 서명국의 자격을 부여할 것 ▲재한(在韓)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한 미(美)군정의 조치를 인정할 것 ▲맥아더라인을 존속시킬 것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 등 요구사항이 담겼다. 독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는 대일 평화조약 초안이 덜레스 특사의 방침에 따라 영토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빠진 상태여서 독도는 당연히 한국 영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이 같은 요구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1951년 7월 9일 양유찬 주미대사가 덜레스 특사를 만났을 때 미국은 한국이 대일 평화조약 서명국에서 배제됐고, 대마도 반환 요구는 기각됐으며, 맥아더라인 존속을 평화조약에 명시하는 것도 어렵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1951년 5월 미국과 영국이 새로 만든 대일 평화조약 초안을 전달했다.

◇유진오와 최남선, “독도·파랑도를 대일 평화조약에 넣어야” 주장

영·미 합동초안에서 일본이 한국에 넘겨주는 섬으로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예시(例示)한 것을 발견한 한국 정부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외교위원으로 합동초안을 검토한 유진오는 1951년 7월 하순 한 일간지에 연재한 ‘대일 강화조약 초안의 검토’라는 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덜레스 초안 때에는 부속도서에 관한 표시가 전혀 없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에 소속돼 왔고, 누구나 다 한국 영토로 알고 있는 부속도서는 당연히 한국 영토가 되는 것이므로 차라리 아무 문제가 없으나 이번 초안에 있어서와 같이 세 도명(島名)을 박아 놓고 보니 도리어 이상한 감(感)이 드는 것이다. 만일 순(純)형식적으로 이 조문을 해석한다면, 그러면 그 섬들만이 한국에 반환되고 나머지 섬들은 의연히 일본 영토로 남아 있는 것이라는 억설(臆說)을 들고 나올 자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조문은 그러한 억설의 여지를 전혀 봉(封)하도록 개정되어야 할 것이며, 만일 본토에서 떨어진 도명(島名)을 예기(例記)할 필요가 있다면 차라리 독도 같은 것을 넣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독도는 우리의 영토임이 명백하지만 이것을 명기해 두지 않으면 장래 말썽이 일어날 여지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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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총장 재임 시절 대일 평화조약 초안 검토에 참여한 헌법학자 유진오. 그는 미국 정부에 독도를 한국 영토로 명기할 것을 요구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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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에게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역사적 내력을 설명해 준 역사학자 겸 문인 최남선.


유진오에게 독도를 명기할 필요성을 주지시킨 사람은 역사학자 겸 문인 최남선이었다. 유진오는 『사상계』 1966년 2월호에 실린 「한일회담이 열리기까지(상)」란 글에서 “제1착으로 찾아간 곳이 최남선 씨 댁이었다. 역사상으로 보아 우리 영토로 주장할 수 있는 섬들이 무엇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육당은 과연 기억력이 좋은 분이라 독도의 내력을 당장에 내가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최남선은 또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은 무리라고 했고, 그 대신 제주도 남쪽에 있는 ‘파랑도’를 우리 영토로 해 두는 것이 좋다고 권유했다.

1951년 7월 19일 다시 덜레스 특사를 만난 양유찬 주미대사는 한국 정부의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담은 제2차 답신서를 전달했다. 첫 번째는 일본이 포기하는 섬의 예시 부분에 독도와 파랑도를 추가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한국 내 일본인 재산의 한국 이양 확인이었고, 세 번째는 맥아더라인 유지였다.

◇주미 한국대사관 “독도는 다케시마 암 부근에 있다” 잘못 답변

한국 측의 요구 사항을 전달받은 미국 국무부는 담당 부서에 이를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1930년대부터 국무부에서 지리담당관으로 근무한 새뮤얼 보그스는 7월 31일 “워싱턴에 있는 모든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두 섬(독도와 파랑도)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그는 그 얼마 전인 7월 13일 일본이 한국에 넘겨주는 섬들의 예시 부분에 리앙쿠르암을 추가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작성했었다. 그런 그도 한국이 말하는 독도가 리앙쿠르암(일본명 다케시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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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무부 지리담당관 새무얼 보그스가 1951년 7월 31일 제출한 보고서. 리앙쿠르암(다케시마)와 독도를 서로 다른 섬으로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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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8월 초 대일 평화조약 최종안 작성을 앞둔 미국 국무부는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에 관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국무부의 한 관리는 주미 한국대사관에 문의했고 “대사관의 관리가 나에게 자신들은 독도가 울릉도 인근, 혹은 다케시마 암 부근에 있다고 믿으며 파랑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보고서에 썼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에는 불과 3~4명이 근무했고, 대일 평화조약에서 한국 정부의 주 관심사는 재한일본인 귀속재산 문제와 맥아더라인 존속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독도에 대해 무지했던 한 외교관의 잘못된 답변은 커다란 부작용을 낳았다. 외교관 한 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미국 국무부는 이후 주한 미국대사관과 주고받은 전문을 통해 독도가 바로 리앙쿠르암(일본명 다케시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상황은 한국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1951년 8월 10일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는 양유찬 주미대사에게 공문을 보내왔다. ‘러스크 서한’으로 불리는 이 공문은 독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독도-달리 다케시마 또는 리앙쿠르암으로 알려져 있는-에 관해서 말하자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이 바위덩어리는, 우리의 정보에 따르면,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도사(島司) 관할 아래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이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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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8월 10일 러스크 미 국무부 차관보가 양유찬 주미대사에게 보내온 서한. "우리의 정보에 따르면 독도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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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크 서한은 한국이 독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이 선전용으로 만든 거짓된 자료에 일방적으로 의존해서 엉터리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러스크 서한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결정했다고 주장하는 주요 논거의 하나로 삼고 있다. 그런 주장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러스크 서한은 그 충격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본 정부나 주일·주한 미국대사관에 통보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체결된 뒤 관련자들도 잘 모르는채 1년 넘게 쟁점이 되지 않고 지나갔다.

◇주일 미국대사관 “러스크 서한 공개해야” 주장

러스크 서한이 문제가 된 것은 19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포로 시작된 한국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분쟁이 1952년 9월 독도에서 발생한 미군기 폭격사건으로 폭발하면서였다. 미국 국무부와 주일·주한 미국대사관이 이 문제의 처리 방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러스크 서한의 존재가 드러났다. 주일 미국대사관은 러스크 서한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결정이 한·미·일 관계의 파국을 가져올까 우려한 미 국무부는 일본 정부에는 러스크 서한을 알리지 않고 한국 정부에만 러스크 서한을 상기시키며 입장 완화를 유도하는 방향을 택했다.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1953년 들어 한·일 간의 독도 분쟁은 점차 수위가 높아졌다. 일본은 계속 독도를 불법 침입했고, 7월 12일 한국 경찰이 일본 어선을 검문하는 과정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주일 미국대사관은 고위 외교관들이 총출동하여 러스크 서한을 공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독도 분쟁으로 혼란이 계속되자 1953년 1월 미국 국무장관에 취임한 덜레스가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는 1953년 11월 19일 주일·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낸 전문에서 “미국이 이 국제적 영토분쟁에서 공개적으로 일본 편에 서는 것이 필요하거나 바람직하다고 믿지 않는다. 이 문제에 법률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미국을 향해 입장을 분명히 밝히라고 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12월 9일 주일·주한 미대사관에 다시 전문을 보내 “미국이 러스크 서한을 작성했다고 해도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의 결정과 무관한 것이며, 미국은 독도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뺀 것이었다. 이후 미국은 한·일 간의 독도 분쟁에서 줄곧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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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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