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인종차별 사건, 독일 언론서 부각돼…당국도 문제의식 커져
혐오·차별 배격해온 독일 지도자들, 아시아인 차별에 아직 단호한 대응 없어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 중 인종차별 사건을 겪은 이모(오른쪽)씨와 김모 씨 부부 ※ 당사자 제공, 재배포 및 DB저장 금지 [베를린=연합뉴스] |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지난 22일 독일의 유력지인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 3면 전면이 한국인 유학생 부부의 아픈 사연으로 채워졌다.
지난달 27일 베를린의 지하철에서 당한 인종차별 폭력 상황을 조명한 기사였다.
이모(남편) 씨, 김모 씨 부부는 당시 5명의 무리에게 '코로나' 등의 인종차별적인 언어 폭력과 함께 성희롱까지 당했다.
유학생 부부는 경찰이 올 때까지 가해 무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용감하게 막아서는 과정에서 물리적 폭력도 당했다.
출동한 경찰은 사건 접수에 미온적이었으나, 주독 한국대사관이 개입하자 태도를 바꿔 조사에 들어갔다.
지난 6일 유학생 부부는 경찰에서 장시간 진술했다. 이들 부부가 사건을 다시 마주하기는 쉽지 않았다. 김 씨는 사건 이후 공황장애를 겪고 있다.
독일은 유럽에서 시민사회 의식이 가장 발달한 국가 중 하나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속죄 속에서 타자에 대한 차별 문제에 민감하다. 이는 2017년 중동 등에서 유럽으로 몰려온 난민 100만여 명을 한꺼번에 받아들인 원동력이 됐다.
그런데도 인종차별의 그림자는 여전하다. 특히 독일 사회가 강력한 경각심을 갖는 유대인 차별과 달리 아시아인 인종차별 문제는 사각지대에 있다.
이 문제가 사회적 주요 의제로 자리 잡지 못한 탓이다.
코로나19 확산사태 속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극심해지고 언론에서도 다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 주목도는 높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 유학생 부부는 사건 직후 피해 사실을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렸다. 국내에서 기사화된 후 독일 언론에도 이 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진 독일 정치+문화연구소장이 인터넷매체 크라우트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을 현지 언론에 처음으로 제기했다.
일간 베를리너모르겐포스트가 유학생 부부를 인터뷰하면서 사건의 개요를 상세히 전달했다.
유력 주간지인 차이트는 지난 25일 '차별을 촉진하는 코비드19'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아시아계 인종차별에 대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유학생 부부가 당한 일을 언급했다.
정범구 한국대사도 이 사건을 계기로 쥐트도이체차이퉁, 베를리너모르겐포스트와 인터뷰를 했다.
이외에도 최근 여러 언론이 아시아계 인종차별 문제를 다뤘다.
또, 일부 교민과 현지인들은 '인종차별은 바이러스다'(Rassismus ist ein Virus)라는 온라인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인종차별은 바이러스다' 캠페인의 페이스북 페이지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베를린=연합뉴스] |
학계에서도 공론화에 나섰다.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의 이은정 교수 주도로 유럽한국학회와 유럽일본학회가 25일 공동성명을 내고 정치인과 언론이 제국주의 시대에 형성된 아시아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신중하게 언어를 구사하고 인종차별을 배격할 수 있도록 시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코로나19 확산 사태 속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대두되자 독일 당국 차원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종차별 및 반(反)유대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방정부 통합특임관실도 최근 아시아계 인종차별 현상에 대해 경고했다.
여기에 최근 독일 내무부는 오는 10월 인종차별과 극우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조치를 내놓기로 했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의 부인인 엘케 뷔덴벤더 여사는 지난 7일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인 김정숙 여사와 통화하면서 "인종차별은 단호히 배척돼야 한다"면서 한국 교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독일 대통령실은 유학생 부부 인종차별 사건에 대해 초기부터 파악했다.
27일로 발생한지 한달이 된 이번 사건이 독일 사회에 경종을 울린 성과들이다.
한국에서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중국인 혐오, 귀국 교민 혐오, 확진자 혐오, 성소수자 혐오 등의 혐오 현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독일에서도 혐오 현상이 문제시되고 있다.
독일 지도자들과 언론은 혐오와 차별 현상에 대해 경고음을 높이면서 이에 대항하기 위한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 접경지역에서 프랑스인에 대한 혐오 행동이 벌어졌을 때 하이코 마스 외무장관이 직접 나서 강도 높게 비판했다.
통상적으로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총리 등 지도자들은 유대인, 난민 등을 상대로 한 차별과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혐오와 증오, 인종차별에 맞서 싸워줄 것을 시민사회에 주문해왔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이민자가 코로나19를 전파한다며 선동을 했던 극우정당은 시민의 지지를 점점 잃고 있다. 혐오와 연대 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현재 연대가 우세한 형국이다.
그러나 아직 아시아계 인종차별 문제를 놓고 독일 시민사회에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한 독일 지도자들의 단호한 대응은 나오지 않고 있다.
혐오 현상을 민주주의의 중대한 적으로 간주해온 독일 사회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다시 이 문제에서 시험대에 놓여 있다. 특히 새롭게 부각되는 아시아계 인종차별 문제에서 말이다.
정범구 대사는 베를리너모르겐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베를린이 안전한 도시라고 느끼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는 한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베를린에서는 누구도 피부색이나 신분증, 은행계좌, 교육 정도를 묻지 않았다'고. 그런데 (유학생 부부) 사건이 발생하고 나니 과연 이렇게 관용적이고 다문화적인 베를린의 모습이 여전히 현실에 부합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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