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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정신대와 위안부 달라”…노동력과 성착취 다른데도 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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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 “정신대에 위안부를 만두 고명으로 사용”

위안부 1930년 초부터 정신대 1940년부터 동원

일본 착취 제기된 1990년대 초반 혼용돼 사용

중앙일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25일 오후 대구 수성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두 번째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 발표를 하던 중 기침을 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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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와 (근로) 정신대가 어떻게 같냐”

25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와 근로정신대 용어를 혼용해 모금 운동을 해온 것을 문제 삼았다. 이 할머니는 “공장 갔던 할머니는 공장에서 일했지만, 위안부 할머니는 간 데가 다르다”며 “생명을 걸고 끌려간 위안부가 정신대 할머니와 합해져 (정신대대책협의회에) 이용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30년 동안 앉아서 사죄해라 배상해라 하는데 일본 사람들이 뭔 줄 알아서 사죄하고 배상하느냐”며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뒤집어 섞어서 이것은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아니냐”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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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이 13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시위에서 발언한 뒤 인사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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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 의미의 위안부는 일본군의 성욕 해결, 성병 예방 등을 위해 일본 정부가 일본군 점령지나 주둔지 등의 위안소에 배치한 여성을 뜻한다. 본질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 ‘성노예’,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이 최근 사용되기 시작했다. 근로정신대는 일본과 국내의 군수 공장 등에 강제 취역했던 조선의 여성들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역사적으로 위안부 피해자는 1930년대 초반부터 발생했고, 근로정신대는 1940년대부터 강제 동원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여성들을 동원해 설치한 시설물을 ‘위안소’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32년 전후였다. 당시 위안소에 수용된 여성을 ‘예기(藝妓)·작부(酌婦)’라 불렀다. 이어 매음부·기녀 등으로 명칭이 다양해졌다가 ‘위안부’라는 말로 수렴됐다. 문서상으로는 1939년부터 위안부로 명시되기 시작했다.

근로정신대는 일본정부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선 남성의 노동력을 착취하다 이마저도 부족하자 여성들까지 징용하면서 등장했다. 문서상으로는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이 제정되면서 ‘여자근로정신대’로 불리기 시작했다.

근로정신대는 노동력의 동원이라는 점에서 성적 착취가 이뤄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르지만 사실 근로정신대라고 모집해 놓고 위안부로 끌려가거나 성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 때문에 위안부와 근로정신대 용어가 혼용돼 사용되기도 했다.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위안부 문제를 증언하기 전까지 근로정신대라는 용어가 위안부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됐다.

박철규 부산일제강제동원역사관장은“1990년 접어들면서 일본 정부의 노동 착취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다”며 “노동 착취와 성 착취는 엄연히 다른데도 착취라는 큰 범주 안에서 혼용됐다”고 말했다. 이어 박 관장은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증언을 하면서부터 개념을 계속 보완해 왔다”며 “최근에는 ‘성노예’라는 단어로 세분화했다”고 덧붙였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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