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감정평가사에 '갑질'을 하지 못하도록 감정평가사 독립성을 보장하는 법안이 마련된다. 은행이 토지·주택 등 부동산 담보대출을 하는 과정에서 대출실적을 늘리려고 "담보가치를 높이라"는 등의 부당한 요구를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은행 '입김'으로 담보가치가 부풀려지면 나중에 대출 부실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
"대출 10억 이상 나오게 담보평가 맞춰라" '슈퍼갑' 은행
━
24일 감정평가업계와 정부 관계부처 등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감정평가사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내용의 '감정평가 및 감정평가사에 관한 법률' 개정을 검토 중이다. 감정평가란 '토지 등의 경제적 가치를 판정해 그 결과를 가액으로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은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 오바마 정부가 광범위한 금융규제법인 '도드-프랭크법'을 마련하면서 감정평가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법안을 추가했다. 우리나라는 변호사, 회계사는 관련법에 따라 의뢰인이 '갑질' 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가 마련돼 있지만 감정평가사에는 아예 이런 기준이 없다.
감정평가업계에서 은행은 '슈퍼갑'으로 통한다. 감정평가 매출액 중 토지, 주택, 상업용 건물 등 부동산 담보가치에 대한 평가 매출액이 전체의 44%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 감정평가 매출액 총액은 8636억원인데 이 중 부동산 담보평가 매출액은 3800억원이었다. 담보평가 의뢰인은 일부 생명보험사를 제외하고 대부분 은행이다.
은행은 아파트 대출을 할 때는 감정평가를 의뢰하지 않고 KB시세나 한국감정원 시세 등을 활용해 담보가치를 매기고 여기에 LTV(담보인정비율)를 적용해 대출액을 산출한다. 하지만 연립주택이나 토지, 상업용 빌딩 등은 객관적인 통계자료가 없어 감정평가사에 담보가치를 의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은행의 '갑질'이 관행처럼 굳어졌다는 것이 문제다. 은행이 대출 실적을 늘리기 위해 담보평가를 의뢰하면서 "대출이 얼마 이상 나가야 한다. 상업용은 담보가치의 80%까지 대출이 나갈 수 있으니 금액을 맞춰달라"는 식의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한 감정평가 업계 관계자는 "대출금을 갚지 않아 부실이 나면 담보평가를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라며 손해배상을 요구한다"며 "은행은 여러 감정평가회사와 복수로 협약을 맺고, 계약서에 손해배상 문구 넣어 부실 책임을 떠넘긴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이라며 감정평가사협회를 제재한 '문서탁상감정'도 일각에선 은행 '갑질' 사례로 본다. 대출실행 전 은행은 담보가치가 어느정도 되는지 협약을 맺은 감정평가업체에 문의한다. 감평사가 평가액을 문서로 제공하면 '문서탁상감정'이다. 정식 감정이 아니라 사전 감정이기 때문에 감정평가사법상 위반 소지가 있다며 협회가 '구두'로만 제공토록 했다가 담합으로 제재 받은 것이다. 협회는 공정위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협회 관계자는 "문서탁상감정은 정식감정이 아니라서 은행이 수수료도 따로 지급하지 않는다"며 "현장을 보지 않고 임의로 책정한 평가액인데 나중에 정식 감정평가를 한 결과 평가액이 줄면 은행이 문제 삼거나 거래를 끊을 수 있어 제대로 된 담보평가를 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
담보가치 부풀리기->대출부실 우려..한국판 '도드-프랭크법' 추진
━
그렇다고 감정평가업체가 '슈퍼갑' 은행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기 어렵다. 은행이 경쟁사에 일감을 몰아주면 타격이 크기 때문이다. 감정평가사협회는 지난 22일 '빅밸류'를 "유사 감정평가를 했다"며 검찰에 고발했는데 그 이면에는 은행이 빅밸류의 AI(인공지능), 빅데이터를 이용한 시세 평가를 이용하면 '일감'이 줄어들 수 있다는 위기감도 작용했다.
은행 '갑질'로 담보가치가 부풀려지고 부실한 감정평가가 고착화하면 대출 부실이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 국토부가 감정평가사 독립성을 강화하는 내용의 제도 도입을 검토하는 배경 중 하나다. 은행이 감정평가 영역에 개입할 수 없도록 하고, 부당한 요구를 할 경우 제재를 하기 위해서는 국토부 소관 법안뿐 아니라 금융위원회 소관 은행법도 함께 개정할 필요가 있다.
권화순 기자 firesoon@mt.co.kr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