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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유가와 세계경제

유가전쟁서 상처뿐인 승리…흔들리는 ‘왕자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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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왕세자, 원유 감산 ‘치킨게임’…푸틴에게 굴욕 안겨

사우디도 유가 하락으로 타격…1분기 재정적자 11조원 달해

결국 예산 10% 규모 긴축재정…‘비전 2030’ 프로젝트도 차질



경향신문



‘석유 왕국’ 사우디아라비아가 11일(현지시간) 전례 없는 긴축재정 계획을 발표했다. 유가 하락으로 구멍난 재정수입을 메우기 위해서다. 하지만 글로벌 유가를 끌어내린 막후에는 35세의 ‘정권 실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사진)가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원유 감산을 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치킨게임’을 벌였고, 마침내 러시아는 감산에 합의했다. 하지만 사우디도 적지 않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무함마드 왕세자는 ‘상처뿐인 승리’를 떠안게 됐다.

사우디 정부가 발표한 긴축재정 정책에는 국책사업을 축소·연기하고 가계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는 등의 방안이 포함됐다. 사우디 재무부는 이슬람 성지 메카의 대사원 확장 공사와 홍해 관광단지 개발 등 정부가 추진해온 대형 사업을 연기하거나 아예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공무원에 대한 월 1000리얄(약 33만원)의 가계 보조금 지원책도 오는 6월부터 중단된다. 긴축 예산 규모는 올해 정부 예산의 약 10%인 1000억리얄(약 33조원)에 달한다. 또 재정수입 손실을 메우기 위해 오는 7월부터 부가가치세율을 현행 5%에서 3배인 15%로 올리기로 했다.

사우디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맨 것은 유가 하락으로 인한 재정적자 때문이다. 올해 1분기에만 341억리얄(약 11조원)의 재정적자를 기록했다. 석유 수출은 지난해 1분기에 비해 24% 감소했고, 이로 인한 수입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2% 줄었다. 정부 재정의 90% 이상을 석유 수출로 거둬들인 수익에만 의존하고 있는 사우디로선 극단적인 긴축재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무함마드 왕세자의 ‘무모한 싸움’이 유가 하락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전 세계에서 도시 봉쇄가 이어지자 원유 수요는 급감했고 산유국들은 벼랑 끝에 내몰렸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러시아 등 비회원국의 회의체인 OPEC+는 지난 3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감산 논의 회의를 열었다. 당시 무함마드 왕세자는 감산을 요구했고, 푸틴 대통령은 감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두 사람은 회의 직전 전화통화에서 이 문제를 놓고 말다툼을 벌였고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욱하는 성격’으로 유명한 무함마드 왕세자는 통화 뒤 오히려 25% 원유 증산을 감행했고, 갑작스러운 사우디의 증산에 국제 유가는 더 곤두박질쳤다. 결국 지난달 14일 러시아는 사우디가 원래 요구했던 감산량의 10배인 1일 500만배럴 감산에 합의했다. 35세의 사우디 왕세자가 ‘현대판 차르’ 푸틴 대통령에게 굴욕을 안긴 것이다.

하지만 무함마드 왕세자의 선택은 자충수의 결과를 낳았다. 왕세자의 자존심 싸움이 유가 하락과 긴축재정을 초래한 꼴이 된 것이다. 정부 석유 수입에서 나오는 경제혜택에 의존해온 사우디 국민들이 입는 타격은 크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원유에만 의존하던 사우디 경제구조를 다각화하겠다는 ‘비전 2030’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왕위 계승에 속도를 내고 있었는데, 긴축재정으로 이 프로젝트도 차질을 빚게 됐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11일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저유가 위협 속에 ‘왕자의 꿈’도 흔들리고 있다고 했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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