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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문재연의 외교탐구] 위안부 문제해결이 지난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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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7일 오후 대구시 남구 한 찻집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수요집회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며 관련단체를 비난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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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위안부·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피해자 당사자들과 시민단체, 정부와의 소통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고노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이후 일본 민간에서 조성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 이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분열을 겪었다. 외교부 안팎에서는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2000년대 초 드러났던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구조적 문제가 재부상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둘러싼 핵심쟁점은 3가지로 볼 수 있다.

1. 일본군 위안소 제도운영에 대한 법적 책임 및 배상

2. 일본군 위안소 운영과정에서의 강제연행(강제동원) 인정

3.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교육 강화

정대협에서는 일본 정부가 문서상뿐만 아니라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법적 책임과 배상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아울러 일본 정부 주도로 위안소 제도의 참상을 교과서에 싣고 강제동원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 중심으로 재편된 국제질서, 한국의 외교전략, 한일 양국의 국력 차이, 미국의 이해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혀 이상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이 지난한 이유다.

실제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위안부 문제의 외교적 해결은 좌절을 반복했다.

1.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배에 대해 법적 배상을 하지 않았다.

독일 얘기가 많이 언급되지만, 독일조차 식민지배에 대해서 100년 만에 사과를 처음 발표했을 뿐 법적 배상을 한 사실이 없다. 폴란드 침공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의 이미지로 독일은 '사죄모범국'으로 꼽히지만, 폴란드 침공에 대해서도 국가배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소련 영향 아래 있던 폴란드 정부는 1953년 소련과 동독의 배상면제협정에 따라 동독으로부터 배상을 받을 권리를 포기했고, 서독은 정부 에산이 아닌 민간 기업이 출자한 재단을 통해 강제노동에 동원된 폴란드인 48만여명에 대한 지원금을 지급했다.

식민지배를 합법화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접근과 그 제국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구축된 국제질서로 주요 강대국의 외교정책 결정자들은 일본의 법적 배상과 책임을 촉구하는 한국의 목소리에 소극적으로 반응해왔다.

2. 한일 청구권 협정은 일본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법적 배상이 끝났다고 명시한다.

한국 정부는 청구권 협정 협의과정에서 위안부 문제가 언급된 적이 없다며 청구권 협정 안에 위안부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본은 청구권 협정이 유효하지만 위안부 피해에 대한 공론화가 1980~1990년대를 걸쳐 이뤄진 점을 감안해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고노담화와 무라야마담화가 나오고 아시아여성기금(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이 탄생했다.

3. ‘강제연행’을 두고 한일간 해석이 다르다.

위안부 피해실태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 ‘꽃다운 나이의 10대 소녀를 강제로 끌고~’라는 표현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일본과 미국의 사료, 국내외 피해자 할머니들의 진술 등을 종합해보면 위안부는 다양한 형태로 모집됐다. 그 유형에는 일본 민간/군에 납치당해 끌려간 피해자들도 있고, 이웃이나 가족에게 속거나 팔려 간 피해자들도 있었다. 모집공고에 속아 위안부에서 벗어나지 못한 피해자들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일부 민간 등의 일탈에 의해 강제연행이 있었더라도 정부 차원에서 강제적으로 위안부를 동원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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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한 쟁점 1~3번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시민단체, 정부가 갈등을 거듭해온 이유들이기도 하다.

이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타결된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당초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일본의 법적 배상 및 책임을 강경하게 요구해왔다. 미국의 주요 안보인사들이 예방할 때마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는 지금도 진행되는 역사인데 그분들은 아주 꽃다운 청춘을 다 망치고, 지금까지 깊은 상처를 갖고 살아왔는데 일본이 사과는 커녕 계속 그것을 모욕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위안부 합의가 이뤄지기 전까지 박 전 대통령 취임 후 한일 정상회담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이유로 개최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같이 강경한 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보였다. 외교영역에서의 문제해결은 법과 윤리, 정의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참모진과 외교전문가들의 조언을 무시한 탓이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부친이 체결한 한일 청구권 협정의 괴리와 한미일 협력체계를 강조한 미국의 압박, 제국주의 국가를 중심으로 재편된 국제질서라는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을 담았지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 및 존엄성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는 담지 못한 아베 총리 명의가 담긴 사과문과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나올 10억엔이라는 돈이 결과물로 담긴 괴기한 합의가 이뤄졌다.

‘강제연행’을 두고 정부와 단체의 해석에도 차이가 있었다. 정부는 일본군 위안소제도 자체가 강제성을 띠기 때문에 일본이 일탈이라고 치부한 강제연행이 만연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정대협은 위안부 피해의 실태를 언급할 때마다 물리적인 강제동원을 강조해왔다.

미완의 형태로 이뤄진 보상금을 둘러싼 피해자 할머니들과 시민단체와의 갈등도 반복됐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시민단체와 갈등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1995년 무라야마 총리와 기금의 전무이사를 지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와다 교수를 비롯한 16명의 민간인들은 민간으로부터 기금을 모아 필리핀, 대만,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284명에게 총 5억 6500만 엔을 지급했다.

문제는 아시아여성기금이 민간이 조성한 보상금이었다는 점이다. 정대협은 아시아여성기금이 일본 정부 차원의 보상이 아닌 위로금이라며 수령에 반대했다.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들도 반대했다는 게 당시 정대협의 주장이다.

하지만 일본 최고재판소(일본판 대법원)에서 처음으로 '위안부'로 인정받은 고(故) 심미자 피해자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심 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있는 사이 현실적으로 일본에 받을 수 있는 사과와 지원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고 아시아여성기금의 지원금을 받았다. 1997년 1월 일본 정부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7명에게 의료지원금을 포함해 1인당 500만 엔의 위로금을 전달했다.

이에 정대협과 시민연대는 “일본정부는 기금을 통한 매수공작을 백지화하고 공식적으로 사죄하라”며 “7명의 할머니들 행동은 올바르지 않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할머니들은 정대협과 정부예산이 합쳐 나온 생활안전지원금을 받지 못했고, 그 외 정부 지원에서도 제외됐다. 정부는 생활안정지원금을 지급하면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한테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정대협와 정부의 조치에는 '법적 배상을 하지 않은 채 도의적 차원에서 위로금을 전달하려는 일본의 시도를 막겠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피해자 할머니들과 그 방향에 동의하지 않은 피해자 할머니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커졌다는 것이다.

심 할머니는 세계평화무궁화회를 꾸리고 32명의 피해자 할머니들과 정대협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냈다. 성명서에는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아들인다면 공창에 들어간 셈이다"는 당시 정대협 대표의 발언과 "기금을 받아들인다면 일본정부에게 면죄부를 주고 우리 스스로 또다시 돈에 팔린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한 시민연대의 선언문을 비판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무궁화회 할머니들의 성명은 '일본의 태도가 쉽게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존해 있을 때 가능한 해결책은 무엇인가'는 질문을 던졌다. 아울러 '피해자중심주의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의견이 다소 차이가 있을 때 어떤 방향으로 실현돼야 하는가'는 질문을 우리 사회에 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수구 세력은 심 할머니의 호소를 정대협의 정당성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공격받은 정대협은 심 할머니처럼 의견에 차이를 보인 피해자 할머니들을 포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정치기반이 바뀔 때마다 입장이 바뀌었다. 결국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부터 재검토, 그리고 이용수 피해자 할머니의 기자회견이 열릴 때까지 이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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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는 시민단체로서의 역할이 존재한다. 비록 이 할머니가 정대협을 비판했지만, 그동안 정대협이 이룬 공론화 작업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 문제도 있었지만, 어쨋든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 하는 데에는 정대협의 역할이 컸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소녀상을 두고 ‘위안부 피해자는 10대 순결한 소녀였다’는 획일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킨다는 지적이 나와도, 위안부 피해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상징물인 점은 부인할 수 없듯이 말이다.

이 할머니의 기자회견은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구조적 문제해결에 소홀했던 우리 모두를 질책하고 있다. 결국 다시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무엇이 진정한 피해자 중심주의이며,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존해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해결책와 장기적인 해결책은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일본의 태도변화였지만, 현실가능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건 모두가 동의할 테다. 아베정권은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했음에도 41%라는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금방 끝날 것만 같았던 자민당의 독주는 계속되고 있다. 정권교체를 이룰 만한 야당 후보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죄가 많은 가해자의 잘못이 큰데도, 피해자들끼리 싸워야 하는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대책을 생각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무관심해온 우리 사회의 잘못도 있기 때문이다.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이 있기 전에도 위안부 피해자들의 호소는 계속 있어왔다.

핵심은 사회영역이 아닌 외교의 영역에서 문제해결을 해야 할 때, 어느 범위까지 피해자중심주의에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수용할 수 있는 해결책이냐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그동안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외교부에서 얘기하는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진전된 부분’은 일본이 법적 배상을 대외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어쨋든 ‘정부예산’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금이 지급된다는 지점이었다. 독일조차 정부 예산으로 지급하지 않은 식민피해 혹은 침공에 대한 보상금을 일본 정부는 정부예산 명목으로 지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을 모두 고려한 문재인 정부는 일단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않되, 일본의 진정성 있는 조치가 이뤄질 때까지 일본에서 지원한 10억 엔을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 및 존엄성 회복을 위한 일본 정부 예산 10억 엔'은 아직 살아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이 성립됐을 때 비로소 이 10억엔은 ‘피해자중심주의적인 재원’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피해자중심주의’의 기준은 무엇일까.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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