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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가족] 삶의 위대함을 존엄한 죽음으로 완성한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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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의 칼럼] 박중철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중앙일보

현대 의학은 편히 삶을 마감할 기회조차 지워버리고 있다. 2009년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최선은 곧 선행’이라는 의사들의 오랜 믿음을 깨뜨렸다. 사건 이후 자기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서둘러 제정됐다. ‘웰빙’ 열풍은 의미 없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웰다잉’으로 대체됐다. 의료계에도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질병과 싸우기 위한 경쟁에만 몰두하던 병원들이 하나둘씩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란 인간이 삶의 마지막까지 자기 정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의료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존엄한 죽음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완성하는 것이기에 의학의 힘만으로는 그 역할을 완성할 수 없다.

내게는 잊지 못할 환자가 있다. 25세에 자궁경부암이 온몸으로 퍼진 여성 환자였다. 그는 미혼모 상태에서 말기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를 출산한 후 바로 항암 치료에 들어갔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아이 아빠는 연락이 끊겼고 이혼한 친부모도 찾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의 항암 치료가 불가능하자 극심한 우울증으로 모든 사람과 대화를 거부한 채 종일 침대에서 울며 죽음을 기다렸다. 우리는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고, 가장 시급한 것은 엄마라는 울타리란 결론을 내렸다. 그 역할은 간병도우미가 맡았다. 사정이 딱하다고 마냥 끌려다니지 않고 심한 응석과 투정에는 야단도 치고 의젓한 모습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마치 친엄마처럼 대했다. 어느샌가 그는 간병도우미를 엄마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과도 대화를 시작했다. 투여되던 진통제는 10분의 1로 줄었다.

그는 또 필름카메라로 사진 찍는 법을 배워 사진작가처럼 매일 병원의 이곳저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인화해 갖다주면 다른 환자들과 의료진에게 선물하며 죽음의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고 평온하게 임종을 맞았다.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로 전원 온 지 42일 만이었다.

물론 모든 환자가 평화로운 마무리를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의 두려움 앞에 속절없이 휘둘리지 않고 의연하게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환자를 볼 때마다 인간의 위대함이 단지 생명의 가치에만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삶의 위대함은 존엄한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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