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국민보고대회를 맡고 있는 국차장은 이렇게 말하며 제게 취재 지시를 했습니다. 어르신들 장수하신다는 얘기는 수십번도 더 나온 얘긴데 새롭게 쓰라니요. 게다가 경제활동이라면, 중장년층 때문에 청년 일자리 갈등 생긴다는 보도가 하루가 멀다하고 나오지 않습니까. 이건 마치, 때지난 재료로 미슐랭 레스토랑 버금가는 제철요리해보라는 주문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투덜댄 제 생각이 짧았다는 걸 깨닫는데는 불과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되레 이 보고서를 만드는 지난 3개월간 제가 가장 많은 지식을 얻어간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자세한 설명 드리기 전에, 우선 '비전코리아 국민보고대회'가 무엇인지부터 소개해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매일경제신문은 지난 1997년 말 그대로 '비전 있는 한국'을 만들기 위해 정부·민간·국내외 연구인력과 힘을 합쳐 한편의 보고서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게 바로 부즈·앨런&해밀턴'한국보고서'였습니다. 지금은 흔히 쓰는 경제용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넛크래커'라는 말도 여기서 처음 나온 말입니다. 이렇게 나온 비전코리아 보고서를 국민들 앞에서 보고하는 게 바로 국민보고대회입니다. 매년 국내외 오피니언 리더 500여분을 모시고 저희 연구 보고서를 선보입니다. 이렇게 97년 이후 매년 한두차례씩 보고서가 나오면서 올해가 29차 국민보고대회가 된 겁니다.
이런 역사깊은 보고대회에 팀장을 맡고나서부터 어깨가 무거웠는데 정작 머리를 아프게 한 일은 딴 데 있었습니다. 보고대회 준비를 시작하고 나서 한달쯤 지났을까요. 1월 중순부터 코로나19가 소식이 외신을 타고 간간히 들려오더니 2월이 되자 거의 모든 외부 활동이 중단되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사람이 모이는 행사를 치룰 수 없다보니 당장 보고대회 행사가 취소된 것도 골치아픈 일이지만 더 큰 문제는 어르신들이었습니다. 저희 이번 보고서의 주제는 역동성 있는 고령자층을 미래 경제 주체로 보고 이들을 위한 경제의 새로운 틀을 마련하자는 내용인데, 정작 고령자층이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던 겁니다.
하지만 저희가 이 보고서를 만들면서 취재한 욜드들은 이 모든 게 쓸데없는 걱정임을 알려주셨습니다. 퇴직자들이 모여 창업한 식당에서는 70세 점주께서 손님들이 불편해할까봐 되레 미안해하셨습니다. 대구에서는 66세 개업의사가 병원문을 닫고 의료 자원봉사를 떠나시면서 인터뷰 가겠다는 저희를 만류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들도 많은데 인터뷰할 시간 따위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장년층이 일을 더 오래한다고 해서 청년 일자리를 뺏지않도록 묘책을 짜내보라는 주문도 하셨습니다.
'욜디락스: 액티브 시니어가 미래다' 보고서는 이런 욜드들의 힘으로 끝까지 진행됐습니다. 우선 빅데이터를 방대하게 분석해 살아있는 욜드의 트렌드를 잡아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경제가 국민소득 5만불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봤습니다. 들어보시면 언뜻 황당하다 하다가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될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들어있습니다.
보고서 작업에 착수했던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코스피는 2000선을 웃돌았으나 이제는 1500선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불과 3개월새 25%가 급락한 겁니다. 코로나19로 경제가 말그대로 수렁에 빠진 상황입니다. 이와중에 국민소득 5만불 시대를 얘기하자니 과도한 희망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제가 펼쳐든 게 지난 1998년 국민보고대회 보고서였습니다. 당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컨설팅사 맥킨지의 빌 루이스 소장은 이렇게 썼더군요. "본 프로젝트가 4분의 3 정도 진행됐을 무렵, 한국에 금융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당시 이보고서는 '한국재창조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빛을 발했습니다. 외환위기의 고통속에서 한국경제의 중장기적 과제를 내다 본 것이지요.
이번 위기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라 믿습니다. 그때 우리 경제의 번민하는 젊은이들이 기댈 수 있는 축은 욜드가 될 것입니다.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이번 코로나위기까지 그 세월을 모두 통과한 어른들이야 말로 우리 경제 문제 해결의 키를 쥐고 계실 겁니다. 그때 들춰볼만한 참고서를 미리 준비해놓는 심정으로, 2020년 국민보고대회 보고서를 내놓습니다.
[한예경 국민보고대회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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