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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데스크에서] 댓글 낭인 된 프로야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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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성호철 산업2부 차장


지난 19일부터 네이버가 댓글 작성자의 과거 이력 전체를 공개하고 있다. 기사에 붙은 댓글 옆의 화살표 아이콘을 누르면 그 작성자가 지난 10여년간 쓴 댓글을 모두 보여준다. 반복적으로 비방글을 다는 악플러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다. 100여 명의 댓글 이력을 확인했더니 그동안 수천~수만 건씩 정치 비방 댓글을 써온 댓글 정치꾼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주요 기사를 찾아다니며 '문재앙'이니 '황교안 죽일눔'과 같이, 자신의 정치색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원색적인 비방 댓글을 쓰는 것이다. 하루 1300여만 명이 보는 네이버의 뉴스 댓글 여론이라는 게 고작 0.1%인 1만~2만명 헤비 댓글러의 손에 쥐이고 흔들리는 현실이다.

유독 눈길을 끈 댓글러는 '문재인 대통령 존경'이라는 닉네임의 네티즌이었다. 19일 오전 11시부터 1~3분 간격으로 주요 기사마다 끊임없이 '문 대통령님 잘하고 계십니다' '이명박그네 때문이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오후 1시가 되기 직전, 댓글은 딱 멈췄다. 이런 내용이 본지 기사로 나간 뒤, 1200여 개의 댓글은 삭제됐다. 이후 네티즌의 닉네임은 '구구'로, 다시 '무적엘지'로 바뀌었다.

무적엘지는 프로야구팀 LG 트윈스의 팬들이 쓰는 표현이다. 추정컨대 그는 LG 트윈스를 좋아하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직장인일 것 같다. 이 네티즌이 극단적인 헤비 댓글러가 된 이유는 '틀딱충'이나 '대깨문'이라는 비하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는 왜곡된 온라인 여론 문화 탓이 크다. '틀니 딱딱 벌레'라는 뜻의 틀딱충(蟲)은 반문 성향의 50~70대 어른들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대깨문은 '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의 줄임말이다. 친문·반문 지지자들은 심지어 욕설 댓글에도 자기편에 유리한 내용에는 서슴지 않고 '좋아요'를 누른다. 소심한 LG 트윈스 야구팬도 이런 공감 수에 취해 점심시간까지 쪼개가며 댓글 여론전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일단 네이버의 조치는 과열된 댓글 여론전을 냉각시키는 효과를 보이는 듯하다. 한때 하루 100만 건이 넘던 댓글 수는 21일엔 37만 건(자진 삭제 제외)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곧 총선이 다가오면 댓글 정치꾼들은 거짓·비방의 그럴듯한 댓글로 다시 대중을 현혹하려 할 것이다. 과거 이력 탓에 정치꾼임이 탄로나면, 신규 아이디를 급조해 '이게 여론입네' 하는 댓글을 올릴 것이다.

미국 트위터에서 가짜 뉴스와의 전쟁을 맡고 있는 닉 피클스 정책 디렉터는 "진실과 거짓을 판명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라고 했다. 트위터는 이용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다양한 맥락과 신호를 주는 데까지라는 것이다. 결국 댓글 정치꾼의 여론 조작 시도를 막는 건, 가짜·비방 댓글에 휘둘리지 않는 이용자의 판단이다.

[성호철 산업2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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