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출간한 에세이집 ‘무소유’
신드롬 일으키며 300만여권 팔려
돈·권력 대신 다른 삶의 길 제시
서울 요정 자리에 들어선 길상사
책 읽고 감동한 거부의 기부로 탄생
성격 까탈했지만 소통의 삶 강조
민주화운동·종교간 대화에 앞장
템플스테이 원조 ‘선수련회’ 열어
“고독할 순 있어도 고립돼선 안돼
고립엔 관계가 따르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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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1932~2010) 10주기다. 법정 스님의 기일인 19일(음력 1월26일) 오전 11시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선 추모법회가 봉행된다. 이 자리에선 ‘스스로 행복하라’는 주제로 2006년 법문했던 모습이 영상으로 상영된다. 길상사에선 3월11일까지 ‘비구 법정 사진전’이 열리며, 3월8일 오후 1시30분엔 설법전에서 ‘무소유를 읽다’를 주제로 음악회가 열린다. 2~11월 매달 넷째 일요일 오전 11시엔 ‘법정 나를 물들이다’를 주제로 특별 좌담이 마련된다.
■ ‘나는 자연인이다’의 모델인 은둔형 인물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든 2년 뒤인 2012년 <엠비엔>에서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친 현대인들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 몸과 영혼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자연인의 단순 소박한 삶을 텔레비전이 아닌 책으로 먼저 보여준 게 법정 스님의 <무소유>였다. 이 책은 1976년 출간된 이래 무려 300만권 넘게 팔렸다. 더 많이 더 빨리 소유하기 위해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속도로 질주하던 한국에서 말이다. 김수환 추기경마저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며 <무소유>에 대한 소유욕을 부채질했다.
법정 스님은 10년 전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말이 <무소유> 소유욕에 다시 불을 질렀다. 당시 교보문고에선 법정 스님의 책 11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법정에서 시작해 법정으로 끝났다. 이번에 샘터가 ‘무소유’, ‘텅 빈 충만’ 등 대표 수필들을 담아 펴낸 <스스로 행복하라>가 한달 남짓 만에 5만부가 팔려 법정 신드롬이 재현되고 있다.
도망치던 법정 스님을 붙들기 위해 안달한 건 출판인들이나 독자들만이 아니었다. 이미 암자와 산골 집을 떠도는 독살이를 하던 그의 무소유를 더욱 그리워한 것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들이었다.
법정 스님에게 성북동 7천여평을 기부해 길상사를 창건케 한 이는 거부 김영한씨였다. 어려서 기생이 된 그는 스물두살 때 천재 시인 백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백석의 집에서 기생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해 백석은 만주로 떠나 김영한을 부르기로 했는데 분단으로 생이별하고 말았다. 김영한은 요정을 차려 성공해 7천여평짜리 고래 등 같은 대원각을 운영했다.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절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법정 스님의 거절로 10년간 씨름하다 결국 기부에 성공(?)해 1997년 길상사가 생겨났다. 김영한은 19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년 7월1일 백석의 생일이면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고 허공만 바라보았다. ‘천억대의 대원각을 어떻게 시주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김영한은 “그까짓 천억,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며 ‘무소유의 대미’를 장식하고 무로 돌아갔다.
■고립되지 말 것, 관계할 것
법정 스님은 주로 암자나 산골 집에서 홀로 살았다는 점에서 은둔자임엔 틀림없다. <오두막 편지>, <홀로 사는 즐거움> 등 책 제목도 은둔형이다. 까칠한 성격 자체가 남과 어울려 살기보다는 홀로 사는 게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성향과 달리 시대와 소통을 중시했다. 대부분의 산사 승려들이 자연인처럼 살아가던 시대에 그는 오히려 일찍이 산사를 벗어나 도회지로 튄 스님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서울 강남 봉은사 다래헌 등에 살면서 민주화운동을 했고, 함석헌이 만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김수환·강원용 등 이웃 종교인들과 종교간 대화에 앞장섰다. 은둔적 경향의 전통 승가에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만큼 시대를 저만치 앞서간 것이다.
그가 1974년 전남 순천 송광사 산내암자 불일암에 내려간 것은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의 생목숨이 하루아침에 죽는 것을 보고 독재자에 대한 증오심을 풀 길이 없어서였다. 그는 은거하면서도 <무소유> 등을 통해 돈과 권력이면 다 된다는 조류와는 다른 삶의 길을 끊임없이 제시했다. 또한 송광사에 ‘선수련회’를 만들어 산사의 수행법을 대중들에게 전했다. 요즘 유행하는 템플스테이의 원조인 셈이다. 그가 머무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전통과 현대, 산사와 대중의 소통이 있었다. 그는 관계의 단절자가 아닌 가교자였다. 자연인처럼 혼삶을 살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와 소통엔 가장 앞선 선구자였던 셈이다. 법정 스님은 말했다.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불일암에서 만난 맏상좌 덕조 스님
법정 스님이 열반 전 ‘나를 만나고 싶으면 오라’ 했던 곳이 송광사 산내암자 불일암이다. 17년을 산 곳이다. 불일암은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하라”는 스승의 유지를 따라 맏상좌 덕조 스님이 지키고 있다. 법정 스님은 젊은 시절 ‘스치면 베일 만큼’ 날카로워 ‘억새풀’로 불렸다. 그런데 맏상좌에겐 ‘덕스러운 할아버지’란 뜻의 ‘덕조’(德祖)라고 한 것을 비롯해 제자들을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 덕일 등 ‘덕 자’ 돌림으로 했다.
2016년엔 인도 오로빌 공동체에 갔다가 덕조 스님 소식을 들었다. 몇주 전 ‘송광사의 사계’란 전시회를 위해 1주간 머문 그가 40도가 넘는 날씨에도 가사 장삼을 수한 채 모든 행사를 마쳐 오로빌리언들이 경탄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웃옷을 다 벗고 있어도 땀으로 범벅이 되고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에도 스승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 불일암에 들렀을 때도 반드시 필요한 것 외엔 소유욕을 털어낸 스승의 삶 그대로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불일암 관람객의 참배 시간도 오전 8시~오후 4시로 제한하고, 관람객들과도 거의 차담을 하지 않고 묵언으로 고독을 자청한 덕조 스님에게 “모처럼 법정 스님의 향기나마 맡으러 온 관람객들과 차담도 좀 하고 이제 좀 덜 빡빡하게 살아도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제 10년이 됐으니, 억새풀이 아니라 ‘덕스러운 할아버지’처럼 살면 안 되느냐는 물음에도 그는 그저 수줍게 웃으며 차만 마실 뿐이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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