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에게 언어폭력을 겪어 지난해 여름 상담을 받은 30대 여성 A씨는 최근 본인이 겪은 폭력이 '가스라이팅'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친구와 5년간 교제하면서 그는 여가생활에 대해 과도한 통제를 받았다. A씨는 "직장인 초년생 시절부터 평일 저녁시간에 독서모임 같은 소모임 활동을 좋아했는데 남자친구와 만나면서 일상이 스트레스가 됐다"며 "다른 모임에서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냐는 추궁을 자주 받아 언제나 모임에 남자가 없다는 셀카를 찍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어느 순간부터는 모임에 나가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죄책감이 들어 한동안 아무 모임에도 나가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의 인재 영입 2호였던 원종건 씨(27)가 과거 연인 B씨의 '미투(Me too·나도 당했다)'로 인해 물러나자 B씨가 당했다고 주장한 데이트폭력 수단 '가스라이팅'의 심각성이 다시 한번 제기되고 있다. 정신적 학대를 통해 데이트폭력으로 이어지는 가스라이팅은 피해자 스스로 피해 사실을 모르는 사례가 많아 심각성이 더 크다.
B씨는 지난 27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폭로 글에서 "최고 기온 35도가 넘는 여름에도 긴 와이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다녔다. 치마를 입더라도 다리를 다 덮는 긴치마만 입었다"며 "그런데도 (원씨가) 허리를 숙였을 때 쇄골과 가슴골이 보인다고 매일 저에게 노출증 환자라고 했다"고 가스라이팅 피해를 주장했다. 가스라이팅은 1983년 제작된 연극 '가스등(Gas Light)'에서 표현된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다. 해당 연극에서 남편은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한 뒤 부인이 이를 지적하면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부인의 현실 인지능력을 스스로 의심하게 해 판단력을 낮추고 남편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만든다. 이처럼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상황을 조작해 타인이 스스로를 의심하도록 만들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한다. 이를 통해 그 사람의 정신을 황폐화하고 지배력을 행사한다. 가까운 관계를 이용해 일종의 세뇌 상태에 빠지도록 만드는 셈이다.
가스라이팅의 심각성은 피해자가 비상식적인 요구를 받아도 이를 비상식적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성적 학대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비상식적인 요구를 해도 '이 정도 관계는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가스라이팅은 2차 피해로 연결되기도 한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가스라이팅은 성폭행을 당한 이후에도 '왜 그때 신고를 안 했냐' '원해서 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수사 과정에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례로 이어질 수 있다"며 "폭력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네 탓이야'라고 하는 것이 가스라이팅 현상이 드러난 예"라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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