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미투 운동의 상징 이토 시오리(30)가 18일 민사 소송에서 이긴 직후 소감을 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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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투 운동의 상징 이토 시오리(伊藤詩織)가 18일 성폭행으로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며 낸 민사 소송에서 이겼다. 프리랜서 기자인 이토가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한 인물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친분이 두터운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 전 TBS 워싱턴 지국장이다.
이토는 2017년 5월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행을 당했다고 공개했다. 직접 얼굴과 실명을 노출하며 일본 내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성폭행 피해자들이 신분 노출을 꺼려 침묵을 지키는 경향이 강한 일본에선 이례적이다. 이 기자회견으로 이토는 일본의 미투(#MeTooㆍ‘나도 당했다’고 공개적으로 성폭행 피해를 공개 고발하는 것)의 상징이 됐다. 기자회견 후 그에 대해선 “일부러 셔츠 단추를 풀고 나온 거 아니냐”는 음해성 보도부터 “이토는 사실 재일 한국인이다”라는 주장까지 쏟아졌다.
이토의 2017년 기자회견 후 야마구치는 “합의된 성관계였다”고 반론하며 “내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맞소송을 냈다. 1억3000만엔(약 13억8700만원)의 배상을 요구하는 명예훼손 소송이었다. 그러나 도쿄지법은 18일 야마구치가 제기한 청구는 기각했다.
승소 직후 법원 앞에서 지지자가 건넨 '승소' 글씨를 들어보이는 이토. BBC 등 외신도 그의 승리에 주목했다. [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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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지법은 대신 이토가 제기한 1100만엔의 손해배상 요구에 대해선 야마구치에게 “이토에게 330만엔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장은 “이토가 성범죄 피해자를 둘러싼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피해를 공표한 행위엔 공공성과 공익성이 있다”며 “(이토가) 말한 내용엔 진실성이 있다고 인정된다”며 이토의 손을 들어줬다.
이토는 승소 후 법원 앞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판결로 일단락을 지었다고 생각한다”며 울먹였다. 그는 이어 “그러나 승소했다고 (피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이토가 민사소송에서 승리한 것은 일본 사회에 던지는 울림이 크다. 앞서 일본 검찰과 경찰이 사건을 덮으려 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 측근인 기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의혹과, 남성 중심이면서 조직 순응을 중시하는 일본 특유의 분위기가 작용했다는 평이 나온다. 이토를 최초로 3시간 단독 인터뷰하며 사건을 알렸던 도쿄신문의 모치즈키 이소코(望月衣塑子) 도쿄신문 기자는 지난 4일 중앙일보와 만나 “시오리씨의 용기는 일본 여성 전체에게 용기를 줬다”고 말하기도 했다. BBC 등 외신도 이날 "일본이 숨겨온 치부를 드러낸 이토가 승소했다"며 관련 소식을 소상히 전했다.
일본 성폭력 피해자 이토 시오리가 쓴 책 '블랙박스' 표지 |
이토가 성폭행을 당한 것은 2015년 4월이다. 이토는 당시 TBS의 워싱턴 지국장이던 야마구치에게 “일거리를 알아봐 주겠다”는 요지의 제안을 받으며 저녁을 함께하다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자 한 호텔에서 야마구치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였다.
이토 시오리가 가해자로 지목한 야마구치 노리유키 전 TBS 워싱턴 지국장이 18일 "항소하겠다"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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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을 찾아갔지만, 수사관은 이토에게 “자주 있는 일이라서 사건으로 수사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형사 소송을 제기했으나 담당 검사는 “블랙박스 같은 밀실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2016년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이토가 이듬해 기자회견을 열겠다는 용기를 낸 것도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는 검사의 말에서 착안해 사건의 전말과 일본 내 성폭행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블랙박스』라는 책도 냈다. 이 책은 한국에도 번역됐으며 이토는 방한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만나 위로하기도 했다. 한국 미투 운동의 상징인 서지현 검사도 만났다. 서 검사는 18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그녀가 받은 고통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이겼다”고 전했다.
이날 승소는 그러나 이토의 말대로 끝이 아니다. 야마구치는 이날 판결 후 기자회견을 열고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 나왔다”며 “나는 법에 저촉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항소하겠다”고 주장했다. 야마구치는 이토의 기자회견 후 TBS를 퇴사했다. 아베 총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총리』를 펴냈고 이후 방송에서 코멘테이터로 활동 중이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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