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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 (목)

[매경데스크] 흑과 백보다는 회색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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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연말 한 모임에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단식 얘기가 나왔다. 한 참석자는 "황 대표가 8일간 단식을 하고 병원에 실려간 걸 보니 신념이 강한 사람"이라며 "리더로서 자질을 갖춘 거 같다"고 말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국가의 리더라면, 나라를 위해 옳다고 믿는 일에는 단식이든 아니든 자기 한 몸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신념이 국가를 위해 옳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신의 옳음을 얼마나 확신할 수 있어야 단식처럼 몸을 해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문득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내 믿음을 위해 죽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내가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너무나 복잡하다. 중대한 이슈일수록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않는 회색지대에 있다. 우리 편이 옳다고 확신하는 걸, 상대 편은 틀렸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상대편의 확신 역시 이쪽 편에서는 새빨간 거짓이라고 지탄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내 옳음을 확신해야 내 한 몸을 던질 수 있는 걸까? 황 대표는 단식으로 생명이 위태해지는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반대하는 자기주장이 옳다고 확신한 걸까? 그날 나는 그런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떤 이들은 회색지대를 싫어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회색지대는 넓을수록 좋다. 넓은 회색지대는 타협과 협상의 공간이 그만큼 넓다는 걸 뜻한다. 옳고 그름이 흐릿한 회색지대에서 자신의 옳음만 관철하고자 하는 건 독단이다. 도덕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회색지대에서는 '내가 틀렸고, 네가 옳을 수 있다'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런 곳에서는 다수가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겁박하지 않는다. 소수 역시 단식이나 폭력으로 다수를 위협하지 않는다. 우리 편이 틀렸고 상대편이 옳을 수 있는데, 왜 겁박과 자해 같은 초강수를 쓰는가.

반면 옳고 그름이 일도양단으로 갈리는 곳에서는 타협은 부도덕한 게 된다. 무조건 옳음을 선택해야 한다. 그게 정의다. 그러나 나의 옳음과 상대의 옳음이 다르다는 게 문제다. 서로가 틀렸다고 손가락질한다. 한쪽이 굴복할 때까지 싸운다. 승자는 패자 위에 발을 올리고 정의가 실현됐다 말하겠지만, 패자는 부정의한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이다.

오늘날 정치 지도자들은 마치 회색지대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자신의 신념이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확신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권 핵심도 절대 덜하지 않다. 국정 캐치프레이즈였던 '적폐 청산'이라는 말에서 여권의 자기 확신이 드러난다. 그들은 황 대표가 공수처와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틀렸다고 확신하는 것 이상으로 두 제도 도입이 절대 옳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는 법. 여권이 제1야당과 타협 없이 두 제도를 도입하려고 하니, 반대편은 그에 상응하는 초강수를 쓰게 된다. 제1야당 대표의 단식까지 나왔다.

러셀의 말이 하나 더 기억난다. "어리석은 이들은 자신만만해하는 반면, 지혜로운 자들은 의심으로 가득하다." 복잡다단한 오늘날, 나의 옳음을 철저하게 확신한다는 건, 어리석음의 증거다. 다수의 힘이나 단식 같은 위협으로 자기 편의 옳음을 관철하려 드는 건 지혜롭지 못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나는 회색지대를 인정하는 실용주의자가 나라의 리더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 사람은 "이쪽 편도 옳고, 저쪽 편도 옳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그랬다. 그는 모순되는 의견을 내는 참모들에게 "너도 옳고 너도 맞는다"고 했다. 루스벨트가 '자기 옳음'에 대한 확신이 강한 사람이었다면, 참모들은 대통령의 확신을 부추기는 의견만 냈을 것이다. 그래서는 올바른 결정을 못 한다. 흑과 백보다는 회색이 좋다.

[김인수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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