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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현실의 아이와 영화적 환상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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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영화 <나를 찾아줘>(왼쪽 사진)와 <감쪽같은 그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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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 이주란의 소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에는 한 가족이 등장한다. 초등학생인 손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외할머니, 이모 그리고 자기 자신, 송이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광고’에서 보는 가족의 형태와는 다르다. 만약 광고 속 가족 모델을 평균, 정상, 평범이라 여긴다면 이 가족은 여러모로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삶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대개의 가족에게 결핍된 것들이 송이의 가족에는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이모 지영은 조카 송이를 방과 후 학교에 데리러 갈 때, 보호자 서명란에 ‘이모’라고 적지 않고 이름 ‘조지영’을 쓴다. 매일 적는 그 서명란에 관계가 아니라 이름을 쓰는 순간,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이모가 데리러 오는 아이가 아니라 조지영씨가 데리러 오는 아이로 기록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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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아이와 할머니의 태도가 듬직하다. 이모가 언니이자 아이 엄마의 기일에 “나만 엄마가 있어서 미안해”라고 말하자 아이는 “괜찮아. 할머니도 엄마 없잖아”라고 대답해준다. 소설의 화자인 지영은 친구 P가 반포에 신접살림을 차렸다며 자랑을 해도 무덤덤하고, 너를 위해 기도한다며 매일 귀찮게 해도 무심히 넘긴다. 이 소박한 삶은 사실 만만치 않은 내공으로 유지되고 있다. 아무나,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이유이다.

11월 화제작이었던 영화 두 편에 ‘아이’가 등장한다. 한 편은 배우 이영애의 14년 만의 복귀작으로 주목을 끌었던 <나를 찾아줘>이고 다른 한 편은 <부산행>의 당돌하고도 똘똘한 소녀 김수안이 주연으로 등장해 나문희와 호흡을 맞춘 <감쪽같은 그녀>이다. 한 편은 아이의 실종을 다루고 다른 한 편은 엄마마저 잃은 아이 둘과 할머니의 동거를 그리고 있다. 두 편 모두 아이가 등장하는데, 세상을 보는 시선은 완전히 다르다. <나를 찾아줘>가 범죄스릴러이고 <감쪽같은 그녀>가 가족 멜로드라마이기 때문만은 아닐 듯싶다.

<나를 찾아줘>의 세계는 냉혹하지만 현실적인 공간이다. 아이가 실종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막연히 아이가 보육원에 맡겨지고 그러다 애타게 찾는 부모와 재회하게 되지 않을까, 짐작해 버린다. 그렇게 짐작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나를 찾아줘>에 그려진 실종 아동들의 세계는 다르다. 납치인지 실종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그렇게 사라진 아이들이 외진 곳에 갇혀 강제노동에 시달린다. 위생도 엉망이고, 최소한의 의료적 대처도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마당에 학교를 비롯한 교육은 아예 불가능해 보인다.

실종 아동 전단을 보고 장난전화를 걸거나 협박전화로 돈이나 갈취하는 사람들도 냉정하지만 현실의 어느 일부일 테다. 영화 <나를 찾아줘>는 아이 혼자 길을 잃었을 때, 아무도 그 아이를 보호해 주지 않는, 예비적 범죄의지로 가득 찬 사회에 집중한다. 이 시각 안에서 아이의 실종 혹은 잃어버림은 범죄적 공간으로의 무방비한 추락과 다를 바 없다. 이 이기적인 세상에서 아이는 경제적 가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묘사된다.

한편 <감쪽같은 그녀>에 그려진 공주와 진주의 세계는 연민과 공감, 배려와 헌신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의 손녀라며 아이를 등에 업고 찾아온 공주. 할머니는 네가 누군지 확인해보자는 말도 없이 두 아이를 덜컥 받아준다. 할머니도 형편이 좋지 않지만 침침한 눈으로 수를 놓아 노점 판매해서 어렵사리 아이들을 돌본다. 12살 초등학생 공주가 진주를 돌보는 것도 어른과 진배없다. 사회복지사도 이 가족을 성심성의껏 돌보고, 이웃이 동생 젖동냥도 해주고, 학교 친구들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심지어, 선량하고 올바른 의사부부가 아픈 동생의 치료비도 대주고, 미래도 맡아주고자 한다. 세상에, 진주와 공주에게는 ‘현실적’인 문제라고는 없다. 먹고, 자고, 입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만 할머니가 아픈 것이 문제일 수 있는 영화적 갈등도 그렇기에 가능하다. 감정적 결별이 슬픔의 원천일 뿐 다른 생계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현실은 <감쪽같은 그녀>처럼 낭만적이지도 <나를 찾아줘>처럼 혹독하기만 하지도 않다. 그런데 어쩐지 더 위험해 보이는 곳은 <나를 찾아줘>가 아니라 이상적 선의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감쪽같은 그녀>의 허구적 복지 천국이다. 특히 유복한 개인이 나서 개인의 불행을 해결해 주는 방식이 문제적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코제트는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된 상황에서 속악한 여인숙 부부에 의해 인신매매가 될 뻔한다. 장발장은 팡틴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코제트를 입양해 딸로 키워 낸다. 마리우스와 사랑의 결실도 맺는다.

빅토르 위고는 한 사람의 선의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곧 세상의 모순과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개인의 선의가 전폭적 해결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굳이 혁명을 언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인의 선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구조적, 법적인 변화, 그게 바로 혁명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비단 부모의 노력만 필요한 게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로 구성된 전통적 가족 모델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의 말대로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돌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게 곧 정상 가족이다. 이주란 소설 속 3대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따뜻함도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가능하다. 현실의 아이는 환상만으로는 키울 수 없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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