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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재난 문자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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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과 함께 사라지는 한 해… 하늘은 어둑하고, 몸은 움츠러든다

몰락이라 해야 할까 멸망이라 해야 할까… 두 단어는 어딘가 다르다

세계가 망한다고 해도 호기심은 충족하고, 하고 싶은 건 해야 한다

조선일보

한은형 소설가


삐이이이이이.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내 전화기였다. 중요한 자리였고, 마침 말하던 사람은 나라서 참을 수 없이 민망해졌다. 당혹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분명히 무음으로 해두었는데… 어떻게 울릴 수 있지? 한파가 몰아친다는 재난 문자였다. 다른 사람 휴대폰도 함께 울려서 그렇게 시끄러웠던 것이다. 재난 문자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매너'가 없었다. 여름에는 폭염이라고, 또 태풍이 온다고, 급박하게 알리는 재난 문자로 잠을 설치곤 했다. 집에 돌아오면서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재난 문자가 올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왜냐하면 요즘 나는 한 세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12월과 더불어 한 해가 사라지고 있다. 단지 기분 문제만은 아니다. 하늘은 어둑하고, 공기는 안 좋고, 몸은 움츠러든다. 몰락이라고 해야 할까, 멸망이라고 해야 할까. 종말이라 하고 싶지는 않다. 종말이라는 말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지하철의 유사 노스트라다무스들에게 오염되었고, 그래서 우습게 들린다. 또 종(終)에는 '사람이 죽다'라는 뜻이 있어 섬뜩하기도 하다. 몰락과 멸망은 어딘가 다르다. '다하여 떨어지다'가 몰락이고, '불이 꺼져 없어지다'를 멸망으로 해석하면 말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멜랑콜리아'는 지구 멸망에 대한 영화다. 지구로 점점 가까워지는 외계 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거라는 두려움에 사람들이 떠는데, 그 외계 행성 이름이 '멜랑콜리아'다. 황홀하게 고양되었다 나른하게 움츠러들기를 반복하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이 음악으로 깔리는 도입부는 압도적이다. 주인공 저스틴의 초점 없는 표정 뒤로 새가 종잇장처럼 떨어지고, 말이 슬로모션으로 주저앉는다. 리처드 아베든이 찍은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화보처럼도 보이는 도입부는, 이질적이고 기괴한데 아름다워서 한숨이 나올 정도다. 라스 폰 트리에는 지구 멸망을 앞둔 사람들의 불안함을 표현하고자 영화를 핸드헬드로 찍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양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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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에 나온 김미월 소설집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에 실린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도 세계 멸망을 다룬다. 여기에서도 지구 멸망 원인은 태양계 외부에서 돌진하는 행성으로, 방송들은 행성이 지구를 박살내려면 얼마가 남았는지를 계속해서 보도한다. 이 소설의 인물은 우울하고 신경질적인 라스 폰 트리에의 인물과 다르다. 택배 기사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을 뛰어올라 배송하고, 아래층에서는 어김없이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고추를 따는데, 지구가 내일 멸망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와 비슷한 면모다(스피노자 전집을 독파한 누군가는 스피노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술자리에서 말했지만). 버스 기사도 버스를 몬다. 평소와 다른 점은 요금을 받지 않는다는 것.

주인공이 상상했던 것과는 꽤나 다르다. 주인공이 대학 시절 쓴 지구 멸망에 관한 글에서는 버스가 한 대만 운행하고, 그래서 꼭 타야 하는 이유를 기사에게 이야기해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나는 지구 멸망에 대해 이런 구체적인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지구가 멸망한다면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하겠느냐는 어린 시절 친구들의 판박이 질문에 '글쎄, 너는?' 하며 되묻는 식이었다. 주인공은 광화문광장에서 사기꾼이 파는, 마시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는 드링크를 산다. 사실은 상표만 떼어낸 박카스인 줄 알면서. 지구가 망하는데 굳이 돈을 벌려는 약장수의 심리가 궁금해서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세계가 망한다고 해도 나는 나인 채로 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호기심이 있다면 충족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고 봐야 한다. '멜랑콜리아'의 방법도 참고할 만하다. 이야기와 상상을 믿는 것이다.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충돌하기 거의 직전, 저스틴은 언니 클레어의 아들을 위해 '마술 동굴'이라는 것을 만든다. 나뭇가지를 엉성하게 엮어 만들어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마술 동굴' 안에서, 저스틴과 클레어와 클레어의 아들은 손을 꼭 잡고 있다. 저스틴은 눈을 뜨고 하늘을 보고 있고, 클레어는 눈을 떴지만 두려움으로 보지 못한다. 오직 클레어의 아들만이 평온하다. 아이는 눈을 감고, 상상 속에, 마술 동굴의 안온함에 자기를 은닉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망한다고 해도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이야기의 힘을 믿게 된다.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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