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예산 처리 시스템이 갈수록 후진화되는 모양새다. ‘소소위(小小委)’를 통해 아무런 견제없이 여야 간사 간 짬짜미로 넘기던 예산에서, 이젠 이마저도 없는 상황이 됐다. 여당과 일부 야권은 제1야당과의 합의없이 예산안을 넘겼다. 약 10년 전 이명박 전 정부의 행태와 비슷하다.
국회는 10일 ‘4+1 협의체’가 만든 수정안을 처리했다. 4+1 협의체는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대안신당(가칭), 정의당, 민주평화당 등이 모여 만든 자체 기구로 법적 정당성이 없다. 제도권 내 기구가 아니었고, 그 자체로 관례가 없는 이례적 협의체였기 때문에 감시체계도 없었다. 누가, 왜, 무슨 이유로 예산을 늘리고 줄였는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이날 공개된 수정 예산안은 수백쪽이 넘는 분량이었다. 그날 공개해 그날 처리했으니 협의체에 있지 않았던 의원들은 사실상 제대로 읽어볼 수 있는 시간조차 없었던 셈이다.
예산안은 앞서서도 부실한 처리로 지적을 받았다. 여야 간사만 참여하는 소소위 밀실회동 관례가 대표적이다. 그동안 언론, 시민사회 등에서 투명성을 담보할 수 없다며 수차례 지적했지만, 바뀌지 않은 정치권 내 행태다. 그런데 이번엔 이 소소위조차 없었다. 소소위는 여야가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그나마 균형성을 어느정도 담보할 수 있는 측면이 있었다. 여당이 독주하려하면 야당이 막고, 야당이 독주하려하면 여당이 막는 ‘보이지 않는 균형’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제1야당이 빠지고 합쳐서 50석도 안되는 야권만 참여했으니 균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나온다.
자유한국당 심재철 원내대표가 20대 정기국회가 종료된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 |
이런 행태는 약 10년 전과 비슷하다. 당시 한나라당과 군소정당인 미래희망연대 의원 등은 민주당을 제외한 채 찬성 165명, 반대 1명으로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이번 예산안은 찬성 156인, 반대 3인이었다. 민주당에서도 “2010년에도 그런 경험이 있고 불법이 아니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2010년 예산 처리과정이 그렇게 되고 난 이후는 말하지 않았다. 2010년 이명박 전 정부의 4대강 예산이 여야의 극심한 대립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는 사실상 마비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4대강 예산을 고집하는 정부를 향해 ‘독재’라고 소리쳤다. 장외집회가 이어졌고, 서명운동이 계속됐다. ‘집권여당이 맞느냐’는 소리도 나왔다. 양보없는 여당과 강경투쟁 야당이 만나 폭발한 셈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여야가 바뀐 정도다.
실제로 여야의 이름만 바꾼 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고, 또 펼쳐질 전망이다. 한국당은 예산안이 통과된 뒤 민주당을 향해 ‘독재’라고 소리쳤다. 민주당이 했던 말이 그대로 민주당에게 꽂히는 셈이다. 곧 장외집회도 더 가열차게 진행한다고 한다.
사실상 20대 국회는 이번 예산안을 기점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더이상 협상은 불가능하다는 전망이다. 심재철 신임 한국당 원내대표도 첫 원내협상에서 실패하면서 ‘협상의 룸(공간)’을 찾기 어렵게 됐다. 협상이 제1책무 중 하나인 원내대표의 할 일이 사라진 셈이다. 원내대표가 원내협상을 놓게되면 한국당은 원외대표인 황교안 한국당 대표의 역할인 투쟁만 남게될 가능성이 크다.
국회는 이런 후진적인 행태를 고치기 위해 국회 선진화법을 도입했다. 2014년 선진화법이 도입되고 이에 따라 12월 1일에는 예산안이 국회 본회의에 자동으로 부의되는 규정이 생겼다. 여야 합의를 강제하는 측면이 있는 규정으로 이후엔 1·2당이 합의하지 않은 예산안이 처리된 적은 없다.
그러나 2019년이 되자 선진화법은 ‘사(死)법화’ 되는 모양새다. 한국당이 몸싸움을 하며 동물국회를 재연하더니 이제는 여권에서 예산안 단독처리를 이끌었다. 다음엔 바로 선거법 등 현안이 정치권에 올라온다. 예산안으로 급격하게 냉각된 국회에서 협상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으니, 선거법도 강행수순으로 갈 수 있다. 그러면 ‘게임의 룰’ 또한 제1야당 없이 결정하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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