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ㆍ심상정, 정치인 최장 단식…한국당, 5시간 30분 최단 단식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5일 청와대 분수대 앞 단식농성장을 찾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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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단식 투쟁에 돌입한 지 9일 만에 단식을 끝냈습니다. 단식 8일째인 27일 밤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이송된 이후 건강 악화와 가족, 의사의 만류로 단식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29일 전희경 한국당 대변인에 따르면 황 대표는 전날부터 미음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단식은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다. 단식에 돌입하기 전 미리 영양제를 맞고 왔다는 논란이 제기됐고, 텐트와 천막 설치를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죠. 20일 처음 청와대 앞에서 단식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황 대표는 바닥에 돗자리만 깐 채 천막 없는 농성을 벌였습니다. 대통령 경호 문제로 청와대 앞 천막 설치가 불허됐기 때문입니다. 이에 처음 이틀 동안 밤에는 국회 본관 앞에 마련한 텐트에서 잠을 자고 날이 밝으면 다시 청와대로 나왔습니다. ‘출퇴근 단식’이라는 얘기는 여기서 나왔습니다.
경호 논란을 의식해서였을까요? 22일 밤부터는 청와대 사랑채 앞에 원터치형 텐트, 임시 가림막 등을 설치해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텐트와 가림막이 10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몽골 텐트’로 진화하기도 했죠.
황 대표는 단식은 끝냈지만 투쟁은 이어나가겠다는 입장입니다. 단식을 시작할 당시 내세운 요구사항 중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파기 철회는 조건부 유예된 상태죠. 그러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포기와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저지는 아직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황 대표는 나머지 목표도 달성하기 위해 “총력 투쟁하겠다”고 밝힌 상태입니다.
◇단식, 민주화 투쟁 카드
단식은 크게 민주화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군부 독재정권 시절에는 민주화 요구 등 정치적 투쟁을 위한 단식이 주를 이뤘습니다. 대표 사례로 김영삼(YS)ㆍ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단식 투쟁을 들 수 있습니다.
우선 김영삼 전 대통령은 5ㆍ18민주화운동 3주년인 1983년 5월 18일부터 6월 9일까지 23일동안 단식을 벌였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단식 시작 전 성명서를 통해 ‘5개 민주화 요구 사항’을 발표했습니다. △언론 통제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 복직 △정치 활동 규제 해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개헌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자, 단식투쟁을 선택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83년 5월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23일 동안 단식을 이어갔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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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택에서 단식을 이어가던 김 전 대통령은 약 일주일 만에 건강이 악화돼 서울대병원에 사실상 강제 입원했습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병원에서도 단식을 이어갔습니다. 동료 의원과 사회 원로 등이 김 전 대통령을 설득한 뒤에야 비로소 단식이 종료됐습니다. 23일 만이었습니다.
◇YSㆍDJ 단식의 성과는?
비록 5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지 못한 채 단식이 종료됐지만, 장기적으로 전두환 정권에 타격을 입혔고, 민주화 투쟁 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단식 기간 중 연대 의사를 표명했는데, 이를 계기로 두 전직 대통령은 그 해 8월 15일 서울과 워싱턴에서 민주화 투쟁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또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는 이듬해 신한민주당 창당의 모체가 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이 민주화 투쟁을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 셈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단식으로 성과를 거둔 경험이 있습니다. 평화민주당 총재였던 1990년,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등을 요구하며 13일간 단식 투쟁을 벌였습니다. 직접적인 계기는 그 해 초에 있었던 3당 합당이었습니다.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이 된 민주자유당이 지방자치제 실시 등 이전에 했던 약속을 무시하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려고 했는데요. 여소야대 상황에서 3당 합당으로 소수야당 신세가 되자 여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 단식으로 맞섰습니다. 그 영향으로 1991년 지방의회 선거, 1995년 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됐는데요. 이로써 김대중 전 대통령은 헌법에 명시된 풀뿌리 민주주의를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민주화 이후의 단식은?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인 2014년 8월 26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참사 단식 농성장에서 8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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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문민정부 출범으로 정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뒤에는 단식의 양상이나 의미가 조금씩 변했습니다. 황 대표의 단식에서 알 수 있다시피,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거나 소신을 밝히는 최후의 수단으로 종종 활용돼 왔습니다. 최병렬 한나라당 전 대표는 2003년 11월 열흘간 단식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를 위한 특검 도입을 관철시켰습니다. 해당 단식은 극단적 투쟁과는 거리가 멀었던 보수세력이 새로운 정치 무기를 쥐게 된 출발점이라는 평도 받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단식 당시 모습은 아직도 회자가 됩니다. 2014년 8월이었죠. 세월호 유가족인 ‘유민아빠’ 김영호씨가 세월호특별법의 국회 통과를 촉구하며 단식을 했는데요. 문 대통령은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동시에 김씨를 말리기 위해 열흘간 동조단식을 했습니다. 문 대통령의 단식은 김씨가 단식 시작 46일 만에 미음을 먹기 시작하자 중단됐습니다. 이후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는 성과가 있었고요.
최근에도 단식투쟁은 이어졌습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지난해 12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며 열흘간 단식농성을 벌였는데요. 공직선거법 개정안 등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에 오른 계기였죠.
◇최장, 최단 단식 기록은?
정치인 중 최장기간 단식은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고 노회찬 전 의원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2011년 7월 13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단식농성에 돌입했습니다. 농성 30일 만인 8월 11일 건강악화와 각계의 요청으로 단식농성을 중단했죠. 당시 노 의원은 혈압과 맥박에 이상을 보여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로 오래 단식투쟁을 벌인 인물은 강기갑 전 민주노동당 의원입니다. 강 전 의원은 2005년 10월 쌀 관세화 유예협상 비준동의안이 상임위를 통과한 것에 반발해 국회 앞에서 29일간 단식을 벌였습니다. 현애자 전 민주노동당 의원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현 전 의원은 제주 군사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2007년 6월 7일부터 7월 3일까지 27일간 단식농성을 벌였습니다. 단식 기간 동안 물, 소금, 감잎차만 섭취해 체중이 11㎏이나 줄고 혈압이 떨어지는 등 건강이 악화되면서 단식을 중단했었죠.
가장 짧은 단식은 올해 초 있었습니다. 한국당 의원들이 1월 조해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임명에 항의하며 5시간 30분씩 릴레이 단식을 벌인 건데,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이 일었습니다. ‘간헐적 단식’, ‘웰빙 단식’이라는 조롱도 뒤따랐습니다.
이처럼 단식은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역효과를 낳기도 합니다. 황 대표의 단식은 정치사에 어떤 단식으로 기록될까요? 목적을 달성한, 요구사항을 관철시킨 ‘역사적 단식’으로 기록될 수 있을까요?
윤한슬 기자 1seu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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