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9 (토)

이슈 미술의 세계

[인터뷰] 화가 이진우 "가장 한국적인 재료 숯·한지 고집해 작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2년 만에 한국서 개인전 연 이진우, 단독 인터뷰
"작품이 모두 '무제'인 이유? '보는 사람'의 의식을 존중하는 것"

지난달 20일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미술관 2층 전시관에 들어서자 한지에 숯으로 거칠게 그려놓은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지가 주는 공간의 여백 속에 숯이 주는 거친 색감, 올록볼록한 질감이 주는 응축된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진우 작가가 2년 만에 한국에서 연 개인전 '玄(현):깊다, 고요하다, 빛나다'에서 선보인 작품들이었다.

조선일보

이진우 작가(왼쪽)가 관람객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프랑스 유명 미술학자인 필리페 필롯(Philippe Filliot)은 이진우를 ‘머리 없는 작가’라고 했다. 머리로 계산된 그림이 아니라 수많은 연습과 시행착오, 세월의 흔적에서 나온 몸짓 그 자체라는 것이다.

실로 그의 그림은 숯으로 그리고 그 위에 한지를 덮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탄생한다. 30년 넘게 수백만번의 쇠솔질을 반복해서 일까. 그의 손가락 지문은 닳아 있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을 묻는 질문에 그는 돌연 화산섬 이야기를 했다. 젊은 시절 교수님을 만나러 화산섬에 갔다가 우연히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을 봤다고 했다. 화산이 터지기 직전의 고요함, 화산이 폭발했을 때의 엄청난 굉음이 이진우 작품의 에너지로도 이어진 듯 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화산이 터지기 직전의 고요함처럼 머릿 속을 사로잡는 잡념이 사라졌고
많던 생각들이 분쇄돼 작은 입자가 되는 느낌마저 든다.

조선일보

이진우 작가가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심민관 기자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작가는 세종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1983년 프랑스로 건너가 1989년까지 파리 8대학과 파리 국립 고등미술학교에서 미술재료학 공부를 하며 미술 공부에 전념했다. 순수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미술재료학을 공부한 이 작가는 회화 작품에서 보이는 겉모습 보다 내면 깊은 곳을 관찰하고 탐구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에서 주로 지내며 작품 활동을 하기에 한국에선 만나기 어려운 화백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개인전을 위해 방한한 이 작가와 지난달 20일과 29일 두 차례에 걸쳐 단독으로 만났다.

― 화산 다녀온 얘기가 궁금합니다. 대체 왜 가신 겁니까.

"제가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병무청에서 통지가 왔어요. 군 입대를 연기하려면 지도 교수님 서명의 확인서가 있어야 했는데 방학 중이라 교수님이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북쪽에 있는 스트롬볼리라는 섬으로 휴가를 가셨더라구요. 굉장히 먼 거리였던 기억이 나요. 파리에서 비행기로 로마로 가서 로마에서 다시 시실리로 이동했죠. 또 이곳에서 인근 항구까지 이동해 배를 타고 그 섬을 겨우 찾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도착했을때 그 섬에 있는 화산이 막 폭발하려는 조짐이 보이는 거에요. 지도 교수님은 평생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보는 일은 흔하지 않다고 직접 봐야 한다고 했어요.

조선일보

이진우 작가가 스트롬볼리섬에서 가져온 화산재를 재료로 사용해 그린 그림. /이진우 작가 제공


교수님 말씀을 듣고 몇 시간을 걸어서 화산이 잘 보이는 지점까지 올라갔습니다. 취재하러 온 기자들도 보였죠. 갑자기 굉음과 함께 화산이 터지는데 그때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마그마가 분출되고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엄청난 광경이었습니다. 산 중턱에서 반대편 분화구 쪽을 보며 담요를 덮고 누웠는데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습니다. 화산 분출 후 화산재가 쌓였는데 옷에 담아와 나중에 작품 재료로 사용했어요."

조선일보

지난 10월 이진우 작가가 개인전에서 선보인 ‘무제’의 그림. /아트조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작품들을 보면 제목이 없습니다. '무제'를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그림의 주인은 작가가 아니라 보는 사람이라는 무언의 메시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제 작품은 항상 제목이 없어요. 물론 저는 각각의 작품을 그릴 때마다 주제가 있고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어요. 하지만 작가의 생각을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강요하고 싶지가 않아요. 그림의 의미는 보는 사람이 스스로 느끼는 대로 정할 수 있게 하는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예술이 사람의 의식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의식이 결국 예술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보는 사람마다 작품을 보고 느끼는게 다른데 그들을 존중하는 것이 예술의 기본이라고 보거든요."

조선일보

이진우 작가가 작업을 하는 모습. /아트조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숯을 재료로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아, 사실 저에게는 한지가 더욱 중요한 재료에요. 숯은 ‘먹’의 확대된 재료인데 먹은 이미 동양미술에서 많이 이야기 됐었죠. 한지를 수십겹 덮어 나가고, 다시 그걸 긁으면서 색을 찾습니다. 한지를 이용하기 때문에 질감도 다른 재료를 쓰는 것보다 확연히 다르고요. 숯 역시 동양미술의 전통 재료로 한지와 궁합이 잘 맞아요. 프랑스에서 서양미술 재료를 공부를 했었는데 가장 한국스런 우리 미술 재료가 뭐가 있을지 고민했었죠. 파리에서 소산 박대성 선생을 만난 이후에는 매일 붓글씨를 쓰는 습관도 생겼습니다. 제가 매일 먹을 갈고 한지 위에 붓글씨를 쓰는 것은 한국에서 사람들이 매일 된장찌개를 먹고 밥을 먹는 것과 같은 이치에요.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지만 한국스러운게 뭔지 잊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그런 점들이 제 작품에도 스며든거라 생각합니다.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추사 김정희 선생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조선일보

작업하는 이진우 작가 모습(왼쪽), 이 작가가 붓글씨 쓰는 모습(오른쪽) /이진우 작가(왼쪽)⋅아트조선(오른쪽)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주변 반대는 없었습니까.

"저 역시 무명 생활이 길었습니다. 파스타 면을 냄비에 삶아서 소금 간만 해서 먹기도 했고, 스티로폼 박스를 구해와서 그걸로 침대를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했어요. 미술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씨앗 같은 것을 구해서 그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구요. 처음부터 유명한 작가였던 것은 아니었어요. 한국에서 프랑스 파리로 와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처음엔 쉬운 선택은 아니었어요. 부모님도 의대나 법대를 진학했으면 했는데, 제가 그림을 그리겠다고 해서 처음엔 반대를 하셨었죠. 하지만 꿈을 찾아 프랑스 파리로 왔습니다. 제게 파리는 자유와 혁명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었거든요."

― 해외에서 활동 하는데 외롭지 않으신가요.

"혼자가 아니라 아내가 항상 저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내는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던 제 미술 제자였는데 서로 마음이 통해 결혼까지 하게 됐어요. 시간이 날때면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 시골 피자집에 가서 장작 피자를 먹기도 하고, 명소로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지금은 든든한 제 후원자이자 인생의 동반자죠."

조선일보

이진우 작가. /아트조선


― 향후 목표가 있으신가요.

"사람이 만든 문화가 사람을 공격하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제 목표는 문화나 예술이 사람을 행복하도록 만드는 것이에요. 저는 예술은 인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보다 중요하지 않다. 인간을 위해 예술이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생각을 들은 분들 중에선 저를 미술계 혁명가라고 부르는 분들도 계세요.

저는 여전히 그림이 세상을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어요. 저는 작품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믿거든요. 제 작품을 보신 분들 중에서 한 목사님은 눈물을 쏟으신 적이 있으셨어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영감을 받으신 거죠. 저는 이러한 영감의 공유가 그림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히틀러가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전쟁을 안하기로 마음을 바꾸게 된다면 그것도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닐까요.(하하)."

[심민관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